문화일보칼럼

<포럼>여론정치의 함정 [오피니언 | 2003-02-05]

yboy 2003. 2. 5. 11:14

노무현 당선자의 회견 자리에는 항상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휘장이 걸려 있다. 여기에 ‘어떤 국민’이 들어갈지는 모르겠으나 국민참여는 이제 대한민국 정치가(街)를 주도하는 새 패션이 될 모양이다. 벌써부터 정부 각료에 국민후보가 추천되고 청와대에 국민참여수석 자리가 모셔지는 등 선진국에서도 찾아보지 못한 직접민주정치의 시도를 우리는 보고 있다.

이렇게 국민 의사에 관심이 큰 정부이니 작년 말 이래 당선자 팀이 고민하던 차기 정부의 호칭은 ‘여론정부’로 함이 마땅할 듯하다. 대통령이 과거의 제왕적 통치 관행을 떨치고 국민여론에 정치를 맡기겠다니 얼마나 신선한 일인가. 그러나 어떠한 좋은 의도도 그 앞길에는 복병(伏兵)이 도사리게 마련이다. 여론과 인기에 집착하는 정부일수록 실패의 시행착오 비용은 더 클 것이며, 따라서 참여정치가 빠지기 쉬운 함정을 더욱 경계해야 한다.

첫째, 누구의 여론이 수렴되는 것인가. 지난 대선 이래 우리 사회는 사회 관념과 생활 양식이 다른 두 집단이 첨예하게 대립함을 보여주었다. 새 대통령의 지지 집단인 신세대 개혁 계층은 첨단 정보통신 수단에 의존하는 오늘날의 여론 형성 시스템을 가장 익숙하게 조작하고 적극 활용하는 집단이다. 노사모 등 인터넷 정치 세력이 이용한 여론몰이 도구가 어떻게 주효하여 선거 승리를 이끌었는지는 이미 과시된 바 있다.

반면, 지난 선거에서 3%에 미치지 못하는 표 차로 패자가 된 기성 보수 세력은 이른바 아날로그세대다. 이들은 향후 이 낯선 정치 기구 아래서 얼마나 참여하여 제자리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현실에서 오직 집계된 여론으로 국민 의사의 실체를 파악한다면 참여정치는 당초 의도를 역행하여 ‘말 못하는 다수’의 기회를 봉쇄하는 정치체제를 오히려 초래할 것이다.

둘째, 여론은 언제나 정당한 것인가. 여론의 맹점은 깊은 사려를 할 수 없는 대중이 자극적 구호와 조삼모사(朝三暮四)같은 시혜 분배에 영합하는 경향이라는 것이다. 냉철한 분석, 이성적 판단과는 거리가 멀어서 냉정한 법리, 엄격한 법치, 무자비한 경쟁시장 원리를 싫어한다. 반면 대중의 감성은 민족 자존심을 부추기고 무조건 차별을 없애며, 부채는 탕감하고 공적 자원은 대중에게 나눠 주는 제안에 항상 이끌린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여론은 역사적으로 국수주의·사회주의·민중주의 선동가들이 기생하는 자원이 되어 왔다. 버나드 쇼는 “정직한 자는 여론 자체를 경멸하므로 여론 조작은 항상 악덕 정치인에 의해 탁월하게 수행된다”고 했다. 이것은 집권자든 이념집단이든 목적성을 가진 세력에 언제나 강력한 무기로 이용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지난 정권은 인기와 업적에 과도히 집착하여 원칙과 질서가 무너지고 생산 에너지가 고갈되는 사회를 남겼다. 근로자를 편들고 이익집단에 눈치를 쓰다보니 사회적 기강이 크게 떨어졌으며, 주 5일근무제를 강행하고 모든 분야에 경쟁 철폐를 조장한 결과 놀고 쓰고 험한 일 안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세태가 되었다. 이것은 1인당 소득 3만달러를 넘어 성장을 멈춘 경제가 누릴 세상이다.

이제 갓 1만달러를 넘어선 한국이 벌써 저축과 근로를 멀리하고 초늙은이 은퇴국가의 대열로 들어서도 되는 것인가. 반면 불법과 비합리가 만연한 양상은 5000달러 후진국 수준보다 못하다. 그러므로 누군가 차기 정부의 절실한 국가 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필자의 여론을 구한다면, 첫째는 법 질서 회복, 둘째는 경제 성장 원동력을 재생시키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진실로 국민을 대통령으로 생각하는 정부라면 이 시점에서 여론 수렴의 제도화를 어디까지 이끌 것인지 재고해 보아야 한다. 여론은 그 자체로 한낱 시중 의견에 불과하다. 그러나 제도적 수렴 과정을 거친 뒤에는 정책 입안의 의무를 강요하는 권력이 부여된다. 여론 형성 집단이 반미를 원하면 반미 정책이 들어서야 하고 평준화와 무차별을 원하면 그런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

당선 전의 정견과 성향이 어떠했든 일단 막중한 자리에 올라서서 냉엄한 대내외 정치·경제 현실을 접하면, 대통령이 보다 합리적이고 신중한 정책 선택을 하게 될 것을 많은 국민은 기대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권력화하는 여론은 향후 대통령의 행보에 족쇄가 될 우려가 크다. 빚 안 지고 당선된 대통령이 초장부터 이념적 집단에 발목잡힐 이유가 무엇인가.

/김영봉 중앙대 경제학 교수


기사 게재 일자 2003-02-05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302050101061419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