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칼럼

<포럼>떼쓰면 뭐든 얻는 세상 [오피니언 | 2003-05-22]

yboy 2003. 5. 22. 11:17

지난번 두산중공업 파업에 정부가 개입한 것은 한국의 모든 이익단체에 벤치마킹을 하게한 사건이었다. 회사를 버리는 사태가 오더라도 끝까지 노사관계의 원칙을 지켜 버티겠다던 사용자측은 신임 노동부장관이 사흘 동안 중재에 나서자 임금 지급과 고소 취하 등 노조측의 주장을 모두 수용하고 백기를 들었다.

이런 사태는 법 질서보다 이상을 존중하는 현 정권이 선택됐을 때 예상했던 일이다. 철도파업 때 국무총리는 불법 파업을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바로 그날 밤 민영화 철회 요구를 100% 수용하여 노조 파업의 원인을 아예 말살시키는 지혜를 보였다.

우리 사회의 모든 이익집단은 이제 새 정부의 의도를 확실히 학습했을 것이다. 정권은 법과 규칙에 의거하기보다 ‘불리한 자를 편들고 설득을 통해 정치적 해결책을 찾는 것’이 분쟁 해결의 원칙임을 누누이 시사했다. 이 원칙은 ‘시끄러운 것은 잠재우고 보자’는 뜻을 내포한다는 것이 곧 밝혀졌다.

화물연대는 그동안 소란을 일으키지 않아 망각된 처지에 있었으나 이번에 확실하게 실력을 보여 줌으로써 버스업자나 용달차가 도전하지 못한 온갖 특혜를 얻게 됐다. ‘물류를 멈추어 세상을 바꾸자.’ 다음에는 ‘나라를 뒤엎자’는 슬로건이 나올 차례다. 오직 ‘더 세게, 더 소란하게’ 밀어붙이는 자만이 이 사회에서는 더 많이 수확할 자격을 가진다.

DJ정부를 지나 현 정부로 넘어오며 집단 이기주의자들이 거둔 개가(凱歌)는 중세시대 서사시(saga)를 보듯 찬란하다. 경주의 스님 한 분이 단식을 시작하자 대통령은 18조원의 예산이 투입된 경부고속철도 건설을 중단시켰다. 서울 용두동 시립병원을 사스지정병원으로 지정했다가 주민의 반대에 놀라 당일로 취소했고, 주민들은 완전 ‘확인사살’이 되도록 닷새동안 시위 점거를 계속했다.

아산군민은 ‘천안아산’역을 ‘아산’역으로 이름 바꾸는 것을 사활의 대사(大事)로 삼아 종합청사에 진치고 농성한다. 분당에서는 150억원으로 건설한 하수 처리 시설을 주민이 점거, 방해하여 단 한번 가동도 못한 채 폐기시키고 새 부지를 물색중이다. 화장운동을 솔선 실천하는 고건 전 서울시장이 “단호한 의지로 끝까지 관철”시키겠다던 원지동 장묘장 건설은 그가 국무총리가 된 오늘날 더욱 단호한 주민의 항거 앞에 거의 무릎을 꿇었다.

교육부가 막대한 예산을 들여 각급 학교에 도입하는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은 이미 90% 이상 완료됐다. 그러나 전교조 교사들이 단식과 연가 투쟁으로 끝을 보겠다고 하니 앞으로 언제 백지화될지 모를 운명이다. 작년 인천시 동구청 공무원 노조는 시장이 감사(監査)차 방문하겠다는 것을 소금을 뿌려 내쫓았다. 이런 공무원 노조의 실체가 인정될 때 그 국정 간섭의 양태는 아마 전교조를 능가할 것이다. 이것을 과연 ‘국가 꼴’이라고 할 것인가.

이것은 누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합의된 규칙이 아무렇게나 무너지는 사회에서 시민은 내일의 삶을 알 수 없다. 382년 전 토머스 홉스는 극단적 이기주의가 인간관계의 지배적 형태임을 갈파했다.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추악하고 잔인하고 거친 삶을 영위하는 불쌍하고 외로운 존재다. 폭력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람들에게 스스로의 자연권을 포기하고 동물 세계를 탈출하는 수단으로 중앙정부(the Leviathan)를 택하게 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정부가 있는 것인가. 정부의 역할이 누구를 편들고 폭력 앞에 굴복하는 것이라면 이 나라에는 범칙자, 시끄러운 자, 떼쓰는 자밖에 남을 사람이 없다. 국가가 국민에게 ‘북한처럼 극한상황으로 몰고가야’ 너희는 얻을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번의 물류란은 단지 서막일 뿐이고, 앞으로 그 크기를 알 수 없는 태풍 대란이 속속 차례를 기다리고 있음을 예시하는 것이다.

어제 노무현 대통령도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는 위기감이 든다”고 했다. 이 계제에 정부가 환골탈태하여 강력하고 엄정한 법 집행자로 돌변, 신뢰를 회복한다면 그보다 큰 다행이 없다. 그런 행운이 없더라도 법에 사는 우리 시민은 어떻게든 이민 가지 말고 투쟁하며 이 무법야만의 시대를 넘겨야 한다. 목소리 높여 탈법자와 그 용납자의 부당성을 외치고 경우에 따라 행동에 나서야 한다. 그리하여 의회와 정부를 단호한 법치주의자로 차례차례 채울 때 미래의 우리 삶이 실업과 폭력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고, 자존심이 짓밟히지 않을 것을 기약할 수 있다.

/ 김영봉 중앙대 경제학 교수

기사 게재 일자 2003-05-22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305220101061419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