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미희 소장 반론에 대한 재반론
최미희 생태경제연구소장의 지난 8월 5일자 포럼은 제목과 같이 ‘갯벌이 최고의 생태자산’임을 잘 설명하고 있다. 글 중 네 번 호명되어 논리의 부당성을 지적받았으니 필자로서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다.
최 소장의 비판을 요약해 보자.
“갯벌을 시장에서 사고파는 물건이라 가정하여 평가하니, 생태계 중 가장 값비싼 것으로 나타났다. 시장교환 과정에서 평가되는 것만 가치로 인정받던 시대는 이미 지난 지 오래이다. 갯벌(tidal flat·김 교수는 갯벌의 영문명을 tidal marsh라 적고있는데 marsh는 관목과 풀이 있는 습지임)을 간척할 경우, 엄청난 비용과 갯벌 파괴, 수질 오염이 발생한다. 새만금공사 집행정지결정은 김 교수의 주장과 같이 갯벌의 가치가 농지보다 몇 십배 크다는 이유를 주된 판단 근거로 삼고 있지 않다. 간척할 때 발생할 ‘환경 피해에 따른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우려할 뿐이다. 그리고 김 교수의 주장과 같이 ‘몇 명 판사가 한 판단’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법부에서 한 ‘결정’인 것이다.”
먼저 오해부터 풀고자 한다. 필자의 7월 25일자 글에서는 재판부가 갯벌 가치를 근거로 집행정지결정을 했다고 주장한 바가 없다. 글은 일관되게 ‘환경단체의 분별없는 행위를 지적하는 것’이었으므로 집행정지결정의 근거는 어디에서도 논하지 않았다. 따라서 재판부의 ‘결정’이 어떤 권위를 가지든 필자가 관심을 둘 사안이 아니다.
필자는 “90% 방조제가 완성된 이 시점에 또 소송이 걸렸다. 그 논란 덩어리의 사업성, 환경 효과, 갯벌 가치를 이제 몇 분 판사님의 안목(眼目)으로 다시 판정해 백지화 여부를 결정한다니…” 하고 한탄했다. 이것은 13년간 아무도 풀을 수 없던 숙제를 앞으로 몇 분 판사가 무슨 수로 풀겠느냐고 탓한 것이다.
또한 “갯벌가치론은 믿지 못할 이론이나 어쨌든 행정법원 판사도 설득했다”고 지적했다. 집행정지의 근거가 무엇이든 당시 재판부는 “‘갯벌 가치가 논거되는’ 본안소송에서도 환경단체가 승소할 수 있다는 개연성”을 분명히 제시했기 때문이다.
갯벌이 영어로 ‘tidal flat’임은 맞는 지적이다. 그런데 갯벌 가치를 크게 부각시킨 콘스탄자(Constanza)등의 ‘네이처(Nature)’지 논문(1997)은 ‘tidal marsh’의 가치를 평가한 것이다. ‘marsh’의 생태적 효과는 풀 없는 ‘flat’보다 오히려 크다고 한다. 필자가 구태여 ‘원문 표기를 따온 것’은 논의되는 자료의 근거를 명확히 하자는 의도이다.
이제 갯벌 가치를 논의하자. 갯벌의 생태적 가치는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시장가치는 증명된 바가 없다. 생태학자는 갯벌의 가치가 논보다 몇 배 크다고 하나 농부에게 물어보면 ‘웃기지도 않는 소리’라고 할 것이다. 농부의 말보다 생태학자의 말을 믿으라고 강요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누구나 내 자식, 내 물건, 내 생각을 소중하게 평가하는데, 이것은 ‘주관적 가치’에 불과하다. 이것이 시장에 나와 누군가 지불의사(willingness to pay)를 보일 때 비로소 객관적 가치, 곧 시장가치가 성립되는 것이다. 갯벌은 이런 시장 과정을 거친 적이 없다.
생태가치든 경제가치든 갯벌의 값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다. 콘스탄자를 비롯해 그동안 무수하게 산출된 갯벌 가치는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조사했느냐에 따라 수십 수백 배까지 차이가 난다.
이 모두가 각기 조사자의 연구 취향과 가치관을 반영하여 탁상에서 계산된 추정치에 불과하다. 그러니 “갯벌이 생태계 중 가장 값비싸다, 시장교환 과정에서만 가치를 인정받던 시대는 지났다” 같은 말은 독단주의자(dogmatist)만이 할 수 있는 주장인 것이다.
이 세상에 개발, 환경, 동성애, 낙태 등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는 무수히 존재한다. 이 충돌하는 가치들을 수렴 조정해 공동체의 가치 체계를 세우는 것이 곧 민주주의의 과정이다. 환경단체도 반핵, 갯벌 같은 가치를 사회공동체의 가치로 인정받으려면 민주주의의 질서를 통해야 한다. 그들에게만 불법 점거와 독단이 허용될 이유가 없다.
폭력과 세뇌를 통해 특정 세력의 주관적 가치를 강요하는 것은 독재자만이 하는 수법이다.
지난 수십년간 오늘과 같이 각종 이념 집단이 난무하고 정부가 중심을 잡지 못하던 때는 없었다. 이럴 때 속고 이용당하고 그 비용을 온통 떠맡는 자는 선량한 시민들이다. 필자의 7·25 포럼은 이들에게 그 하나의 예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다.
/ 김영봉 중앙대 경제학 교수
기사 게재 일자 2003-08-14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3081401010614191002
최미희 생태경제연구소장의 지난 8월 5일자 포럼은 제목과 같이 ‘갯벌이 최고의 생태자산’임을 잘 설명하고 있다. 글 중 네 번 호명되어 논리의 부당성을 지적받았으니 필자로서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다.
최 소장의 비판을 요약해 보자.
“갯벌을 시장에서 사고파는 물건이라 가정하여 평가하니, 생태계 중 가장 값비싼 것으로 나타났다. 시장교환 과정에서 평가되는 것만 가치로 인정받던 시대는 이미 지난 지 오래이다. 갯벌(tidal flat·김 교수는 갯벌의 영문명을 tidal marsh라 적고있는데 marsh는 관목과 풀이 있는 습지임)을 간척할 경우, 엄청난 비용과 갯벌 파괴, 수질 오염이 발생한다. 새만금공사 집행정지결정은 김 교수의 주장과 같이 갯벌의 가치가 농지보다 몇 십배 크다는 이유를 주된 판단 근거로 삼고 있지 않다. 간척할 때 발생할 ‘환경 피해에 따른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우려할 뿐이다. 그리고 김 교수의 주장과 같이 ‘몇 명 판사가 한 판단’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법부에서 한 ‘결정’인 것이다.”
먼저 오해부터 풀고자 한다. 필자의 7월 25일자 글에서는 재판부가 갯벌 가치를 근거로 집행정지결정을 했다고 주장한 바가 없다. 글은 일관되게 ‘환경단체의 분별없는 행위를 지적하는 것’이었으므로 집행정지결정의 근거는 어디에서도 논하지 않았다. 따라서 재판부의 ‘결정’이 어떤 권위를 가지든 필자가 관심을 둘 사안이 아니다.
필자는 “90% 방조제가 완성된 이 시점에 또 소송이 걸렸다. 그 논란 덩어리의 사업성, 환경 효과, 갯벌 가치를 이제 몇 분 판사님의 안목(眼目)으로 다시 판정해 백지화 여부를 결정한다니…” 하고 한탄했다. 이것은 13년간 아무도 풀을 수 없던 숙제를 앞으로 몇 분 판사가 무슨 수로 풀겠느냐고 탓한 것이다.
또한 “갯벌가치론은 믿지 못할 이론이나 어쨌든 행정법원 판사도 설득했다”고 지적했다. 집행정지의 근거가 무엇이든 당시 재판부는 “‘갯벌 가치가 논거되는’ 본안소송에서도 환경단체가 승소할 수 있다는 개연성”을 분명히 제시했기 때문이다.
갯벌이 영어로 ‘tidal flat’임은 맞는 지적이다. 그런데 갯벌 가치를 크게 부각시킨 콘스탄자(Constanza)등의 ‘네이처(Nature)’지 논문(1997)은 ‘tidal marsh’의 가치를 평가한 것이다. ‘marsh’의 생태적 효과는 풀 없는 ‘flat’보다 오히려 크다고 한다. 필자가 구태여 ‘원문 표기를 따온 것’은 논의되는 자료의 근거를 명확히 하자는 의도이다.
이제 갯벌 가치를 논의하자. 갯벌의 생태적 가치는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시장가치는 증명된 바가 없다. 생태학자는 갯벌의 가치가 논보다 몇 배 크다고 하나 농부에게 물어보면 ‘웃기지도 않는 소리’라고 할 것이다. 농부의 말보다 생태학자의 말을 믿으라고 강요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누구나 내 자식, 내 물건, 내 생각을 소중하게 평가하는데, 이것은 ‘주관적 가치’에 불과하다. 이것이 시장에 나와 누군가 지불의사(willingness to pay)를 보일 때 비로소 객관적 가치, 곧 시장가치가 성립되는 것이다. 갯벌은 이런 시장 과정을 거친 적이 없다.
생태가치든 경제가치든 갯벌의 값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다. 콘스탄자를 비롯해 그동안 무수하게 산출된 갯벌 가치는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조사했느냐에 따라 수십 수백 배까지 차이가 난다.
이 모두가 각기 조사자의 연구 취향과 가치관을 반영하여 탁상에서 계산된 추정치에 불과하다. 그러니 “갯벌이 생태계 중 가장 값비싸다, 시장교환 과정에서만 가치를 인정받던 시대는 지났다” 같은 말은 독단주의자(dogmatist)만이 할 수 있는 주장인 것이다.
이 세상에 개발, 환경, 동성애, 낙태 등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는 무수히 존재한다. 이 충돌하는 가치들을 수렴 조정해 공동체의 가치 체계를 세우는 것이 곧 민주주의의 과정이다. 환경단체도 반핵, 갯벌 같은 가치를 사회공동체의 가치로 인정받으려면 민주주의의 질서를 통해야 한다. 그들에게만 불법 점거와 독단이 허용될 이유가 없다.
폭력과 세뇌를 통해 특정 세력의 주관적 가치를 강요하는 것은 독재자만이 하는 수법이다.
지난 수십년간 오늘과 같이 각종 이념 집단이 난무하고 정부가 중심을 잡지 못하던 때는 없었다. 이럴 때 속고 이용당하고 그 비용을 온통 떠맡는 자는 선량한 시민들이다. 필자의 7·25 포럼은 이들에게 그 하나의 예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다.
/ 김영봉 중앙대 경제학 교수
기사 게재 일자 2003-08-14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308140101061419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