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금 방조제 공사가 또 중단됐다. 10년여 세월 1조7000억원이 이미 투입돼 완료를 눈앞에 둔 공사를 ‘환경단체 등 원고측이 본안 소송에서 승소할 개연성’이 있어서 중단시켰다고 행정법원은 말했다. 국가 사업 운명과 국가적 의사결정 체계가 이렇게 덧없이 파괴될 수 있는 것이 한국의 시스템이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새만금사업의 파란만장한 과거를 누가 모르는가. 무수한 조사, 격렬한 투쟁, 지루한 찬반 토론과 대통령의 결단을 거쳐 오늘의 사업이 확정됐고, 와중에 환경단체 소송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도 얻어냈다. 90% 방조제가 완성된 이 시점에 또 소송이 걸렸다. 그 논란 덩어리의 사업성, 환경 효과, 갯벌 가치를 이제 다시 몇 분 법원 판사님의 안목(眼目)으로 판단해 백지화 여부를 결정한다고 한다. 삼권 분립이든 참여사회든 분별력 없는 사회에서는 어떠한 민주적 제도도 가공할 파괴적 무기가 됨을 입증했다고 하겠다.
DJ-노무현시대 새로운 권력 집단으로 부상한 것이 환경단체이다. 국가 사업을 표류시킴에 있어 이들은 시위, 점거, 실력 대치, 소송 등 불법·합법의 수단을 무소불위로 동원하지만, 특히 대중을 상대로 한 선전 수법이 일품이다.
정부가 사력으로 안전함을 홍보하며 찾아다니는 핵폐기장 후보지에서는 생식기 장애, 무뇌아 출산, 백혈병을 내세워 지역 주민의 유치 포기를 유인한다. 국립공원 생태계 파괴를 선전하며 북한산 관통 외곽순환도로 터널 공사를 막지만 그 대안인 의정부시 우회 노선이 수락산을 파괴하여 산림 훼손을 10여만평 오히려 늘린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는다. 물론, 지난 500여일 간의 실력 행사로 매일 8억원의 국고 손실이 누적되고 우회노선이 수조원의 추가 공사비, 수십 개월의 공사 지연, 수km의 운행 거리 연장을 공연히 초래함도 선전하지 않는다.
새만금 시비에 등장한 ‘갯벌가치론’은 그런 선전의 백미(白眉)이다. 갯벌이 논밭보다 몇 배, 몇십 배 값어치가 크다는 믿지 못할 이론이지만 어쨌든 행정법원 판사님도 설득력을 갖게 했다. 이 이론의 자랑스러운 근거의 하나가 세계적 권위의 과학학술지 ‘네이처(Nature)’에 게재된 논문(Constanza 등 1997)으로 ‘세계 생태계에 제공하는 가치’를 다룬 것이다.
논문은 갯벌(tidal marsh)이 헥타르당 연간 9990달러를 발생시켜 경작지 가치 92달러의 100배가 넘는다고 평가했다. 갯벌은 평당 4000원, 논밭은 36원 나가며, 덧붙여 늪지 수렁은 경작지의 210배인 7500원, 도시 주거지 땅은 아예 가치가 없다고 했다. 이것은 인간이 동물처럼 뒹굴며 살 때 느끼는 ‘생태계 서비스(ecosystem service)의 가치이다.
강원도 산골 마을은 공기와 경관이 기막히지만 꽉 막히고 매연에 찌든 강남 땅값의 1%도 안 된다. 경포대 해수욕장의 생태 가치 없는 모래를 갯벌이 뒤덮는다면 아무도 찾지않는 버림의 땅이 된다. 이것이 문명세계의 계산법이고, 환경운동가들도 사는 방식이다.
인간이 쓰고 즐기는 모든 재화와 용역, 곧 경제재(經濟財)의 가치는 오직 시장 교환의 과정에서 평가되는 것이지, 자연과학자, 환경인, 법원 판사의 머리에서 계산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자기 집, 논밭을 서해안 갯벌 몇 평과 바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환경운동가들은 진정 이를 믿고 선전하는 것인가.
오늘날 십수조원의 예산이 투입된 경부고속철도, 경인운하, 파주 문산의 홍수 예방을 위한 한탄강댐, 이 밖에 수많은 국가적 건설 사업이 이런 가치 놀음에 빠져 하릴없이 표류하고 있다. 환경인들은 매년 수천억, 수조원이 될지도 모를 국고를 축낼 권리가 있는가.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오늘날 국민소득 2만달러 돌파를 외쳐 대는 무수한 대중이 “갯벌이 땅보다 중요하다”는 가치 혼돈에 서슴없이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같이 첨예한 무한경쟁 시대에 국민이 황금을 돌처럼 버리고 무위자연(無爲自然)사상에나 들떠 있으면 나라가 어떤 모습이 될 것인지 모두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 국민이 언제부터 자연생태를 걱정할 만큼 고상해졌는지도 돌이켜볼 일이다. 산, 강, 도시 어디를 가나 우리 주변은 시민이 버린 쓰레기, 분비물, 배출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런 세속의 땅을 보다 깨끗하고 살기 좋은 터전으로 만들기 위해 환경인들이 참여하고 감시할 일은 얼마든지 있다. 이들이 지구의 생태를 구하겠다는 거창한 주제 대신 우리 이웃의 생활 환경을 먼저 걱정할 때, 필자 같은 사람도 친구가 되는 시민단체가 될 것이다.
/ 김영봉 중앙대 경제학 교수
기사 게재 일자 2003-07-25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3072501010614191004
새만금사업의 파란만장한 과거를 누가 모르는가. 무수한 조사, 격렬한 투쟁, 지루한 찬반 토론과 대통령의 결단을 거쳐 오늘의 사업이 확정됐고, 와중에 환경단체 소송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도 얻어냈다. 90% 방조제가 완성된 이 시점에 또 소송이 걸렸다. 그 논란 덩어리의 사업성, 환경 효과, 갯벌 가치를 이제 다시 몇 분 법원 판사님의 안목(眼目)으로 판단해 백지화 여부를 결정한다고 한다. 삼권 분립이든 참여사회든 분별력 없는 사회에서는 어떠한 민주적 제도도 가공할 파괴적 무기가 됨을 입증했다고 하겠다.
DJ-노무현시대 새로운 권력 집단으로 부상한 것이 환경단체이다. 국가 사업을 표류시킴에 있어 이들은 시위, 점거, 실력 대치, 소송 등 불법·합법의 수단을 무소불위로 동원하지만, 특히 대중을 상대로 한 선전 수법이 일품이다.
정부가 사력으로 안전함을 홍보하며 찾아다니는 핵폐기장 후보지에서는 생식기 장애, 무뇌아 출산, 백혈병을 내세워 지역 주민의 유치 포기를 유인한다. 국립공원 생태계 파괴를 선전하며 북한산 관통 외곽순환도로 터널 공사를 막지만 그 대안인 의정부시 우회 노선이 수락산을 파괴하여 산림 훼손을 10여만평 오히려 늘린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는다. 물론, 지난 500여일 간의 실력 행사로 매일 8억원의 국고 손실이 누적되고 우회노선이 수조원의 추가 공사비, 수십 개월의 공사 지연, 수km의 운행 거리 연장을 공연히 초래함도 선전하지 않는다.
새만금 시비에 등장한 ‘갯벌가치론’은 그런 선전의 백미(白眉)이다. 갯벌이 논밭보다 몇 배, 몇십 배 값어치가 크다는 믿지 못할 이론이지만 어쨌든 행정법원 판사님도 설득력을 갖게 했다. 이 이론의 자랑스러운 근거의 하나가 세계적 권위의 과학학술지 ‘네이처(Nature)’에 게재된 논문(Constanza 등 1997)으로 ‘세계 생태계에 제공하는 가치’를 다룬 것이다.
논문은 갯벌(tidal marsh)이 헥타르당 연간 9990달러를 발생시켜 경작지 가치 92달러의 100배가 넘는다고 평가했다. 갯벌은 평당 4000원, 논밭은 36원 나가며, 덧붙여 늪지 수렁은 경작지의 210배인 7500원, 도시 주거지 땅은 아예 가치가 없다고 했다. 이것은 인간이 동물처럼 뒹굴며 살 때 느끼는 ‘생태계 서비스(ecosystem service)의 가치이다.
강원도 산골 마을은 공기와 경관이 기막히지만 꽉 막히고 매연에 찌든 강남 땅값의 1%도 안 된다. 경포대 해수욕장의 생태 가치 없는 모래를 갯벌이 뒤덮는다면 아무도 찾지않는 버림의 땅이 된다. 이것이 문명세계의 계산법이고, 환경운동가들도 사는 방식이다.
인간이 쓰고 즐기는 모든 재화와 용역, 곧 경제재(經濟財)의 가치는 오직 시장 교환의 과정에서 평가되는 것이지, 자연과학자, 환경인, 법원 판사의 머리에서 계산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자기 집, 논밭을 서해안 갯벌 몇 평과 바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환경운동가들은 진정 이를 믿고 선전하는 것인가.
오늘날 십수조원의 예산이 투입된 경부고속철도, 경인운하, 파주 문산의 홍수 예방을 위한 한탄강댐, 이 밖에 수많은 국가적 건설 사업이 이런 가치 놀음에 빠져 하릴없이 표류하고 있다. 환경인들은 매년 수천억, 수조원이 될지도 모를 국고를 축낼 권리가 있는가.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오늘날 국민소득 2만달러 돌파를 외쳐 대는 무수한 대중이 “갯벌이 땅보다 중요하다”는 가치 혼돈에 서슴없이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같이 첨예한 무한경쟁 시대에 국민이 황금을 돌처럼 버리고 무위자연(無爲自然)사상에나 들떠 있으면 나라가 어떤 모습이 될 것인지 모두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 국민이 언제부터 자연생태를 걱정할 만큼 고상해졌는지도 돌이켜볼 일이다. 산, 강, 도시 어디를 가나 우리 주변은 시민이 버린 쓰레기, 분비물, 배출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런 세속의 땅을 보다 깨끗하고 살기 좋은 터전으로 만들기 위해 환경인들이 참여하고 감시할 일은 얼마든지 있다. 이들이 지구의 생태를 구하겠다는 거창한 주제 대신 우리 이웃의 생활 환경을 먼저 걱정할 때, 필자 같은 사람도 친구가 되는 시민단체가 될 것이다.
/ 김영봉 중앙대 경제학 교수
기사 게재 일자 2003-07-25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307250101061419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