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오의 땅(Land of the Pharaoh, 1955)’은 윌리엄 포크너가 각본을 쓴 할리우드 대작이다. 영화에서 파라오 쿠푸(Khufu)는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설하고자 백성들 앞에서 연설한다.
“너희들은 태양의 아들 파라오와 함께 살도록 선택받았다. 그러나 이 행운은 이 세상에서 그치고 죽음이 너희를 파라오와 이별시킬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불쌍한 너희를 사후 세계까지 데려갈 거대한 궁전을 짓기로 했다. 이 궁전에서 너희의 영혼은 태양의 아들을 영원히 모시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백성들은 환호작약했다. 첫 해의 피라미드 공사장에는 인부들의 노랫소리가 가득 찼다. 파라오와 영생하는 기쁨에 작열하는 태양 아래 거석을 캐고 나르는 육신의 고통은 멎었다. 둘째 해가 되니 채석장은 수십 리 밖까지 연장됐다. 끝을 모르는 고된 노역에 백성들의 입은 닫히고 대신 작업을 독려하는 병사들의 북소리가 공사장을 울렸다. 셋째 해에는 북소리도 그쳤다. 기진맥진한 노역자들을 매질하는 채찍 소리만이 공사장을 메운 것이다.
북한과 같은 나라에서 북과 춤은 체제를 지키는 필수적 도구가 된다. ‘장군님의 땅’에는 태양처럼 섬기는 수령이 있고, 사역되고 굶주리는 백성이 있다. 이들을 집단 광기에 몰아 넣어 이성의 활동과 육체의 고통을 마비시키는 것이 바로 선전가무부대의 역할이다. 북한의 속도전과 노력 배가 작업장에는 어디에나 고무(鼓舞)대가 등장했다. 문화혁명의 선두에서 붉은 깃발 휘두르며 춤추는 홍위병이나 영생교 예배전에 박수치는 기도대나 고금의 교조(敎條) 조직은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이런 마취법을 동원했다.
바로 그 가무부대가 지난 주 대구에 왔다. 북한이 대구 유니버시아드에 300명의 여대생 ‘가무원정대’를 보낸 의도는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이들의 영양 좋은 얼굴, 화사하게 핀 웃음에서 어떻게 굶고 신음하는 북한 인민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 행복한 인민국가를 파괴하고 남북을 갈라놓으려는 자가 누구인가.
대구를 떠나며 북한의 장정남 선수단장은 우리는 “정치적 금메달을 목에 걸고 돌아간다”고 선언했다. 그 금메달을 안긴 것은 물론 한국 사람, 한국 정부이다. 북한 미녀들은 ‘통일이여 오라’를 노래하고, 그 춤에 어울린 남쪽의 동포는 ‘우리는 하나’를 찬미했다. 과연 이들은 어떤 통일을 노래하고 어떤 하나를 찬미한 것인가. 북한에 그들의 체제와 지도자를 버릴 통일이란 ‘어떤 경우’에도 없다. 이성(理性) 활동이 마비돼 무조건 환호하는 것은 남쪽이다.
그런데도 이창동 장관은 “우정과 화합을 위한 스포츠 제전을 정치적인 목적에 이용”한다고 국내 단체들을 경고했다. 이것은 무슨 환각증세인가. 북한의 안중에 동참한 지구촌 선수들이 있어서 대회 내내 보이콧 위협을 일삼았다고 장관은 생각한 것인가. 북한 응원단만 넋 잃고 따르던 관중, 이들만 비춘 카메라, 텅 빈 다른 경기장은 북한이 그들 말대로 어떤 ‘승전의 마당’을 펼쳤는지를 말해준다.
명색이 세계 젊은이의 체육제전이라고 차려 놓고 당국은 북한 선수단의 행보에만 일희일비했다. 그들이 안 온다면 놀라고, 돌아간다면 사과했다. 170여 다른 국가에서 온 선수들은 한민족 행사의 들러리가 됐을 뿐이다. 지난주 대구시가 주최한 것이 과연 국제 스포츠 제전이었는지 돌이켜볼 일이다.
3주전 우리는 평양에서 개최된 KBS 노래자랑을 보았고 이어 북한 응원단을 보았다. 현 정부의 취향으로 보아 이런 식의 남북 교류는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 같다. 이런 행사 때마다 으레 비용은 전액 남쪽 부담이고 덧붙여 상당한 ‘선물’까지 보내야 했던 것은 알 만큼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북한은 이념으로 무장된 ‘국가예술단’을 보내고 남한의 민간 단체는 동포와의 만남에만 들떠 있다. 이런 비대칭의 집단이 한 바탕 어울린 뒤 남쪽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연출된 화면 속에 북한은 미화되고 남쪽은 대북 온정주의만을 키운 것 아닌가. 그리하여 반미 감정은 쌓이고 경제, 고용과 안보에 위협만 증대된 것 아닌가.
스포츠나 문화 교류는 분명히 한반도 평화 증진에 도움이 되는 행사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호 상대를 배려하는 이성적인 당사자가 만날 때의 일이다. 무작정 확산시키는 문화 교류는 북한에는 대남 선전장터를 제공하고 남쪽에는 이념적 갈등만 생산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돈 주고 독을 사는 어리석은 자의 놀음일 것이다.
/ 김영봉 중앙대 경제학 교수
기사 게재 일자 2003-09-03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3090301010614191002
“너희들은 태양의 아들 파라오와 함께 살도록 선택받았다. 그러나 이 행운은 이 세상에서 그치고 죽음이 너희를 파라오와 이별시킬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불쌍한 너희를 사후 세계까지 데려갈 거대한 궁전을 짓기로 했다. 이 궁전에서 너희의 영혼은 태양의 아들을 영원히 모시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백성들은 환호작약했다. 첫 해의 피라미드 공사장에는 인부들의 노랫소리가 가득 찼다. 파라오와 영생하는 기쁨에 작열하는 태양 아래 거석을 캐고 나르는 육신의 고통은 멎었다. 둘째 해가 되니 채석장은 수십 리 밖까지 연장됐다. 끝을 모르는 고된 노역에 백성들의 입은 닫히고 대신 작업을 독려하는 병사들의 북소리가 공사장을 울렸다. 셋째 해에는 북소리도 그쳤다. 기진맥진한 노역자들을 매질하는 채찍 소리만이 공사장을 메운 것이다.
북한과 같은 나라에서 북과 춤은 체제를 지키는 필수적 도구가 된다. ‘장군님의 땅’에는 태양처럼 섬기는 수령이 있고, 사역되고 굶주리는 백성이 있다. 이들을 집단 광기에 몰아 넣어 이성의 활동과 육체의 고통을 마비시키는 것이 바로 선전가무부대의 역할이다. 북한의 속도전과 노력 배가 작업장에는 어디에나 고무(鼓舞)대가 등장했다. 문화혁명의 선두에서 붉은 깃발 휘두르며 춤추는 홍위병이나 영생교 예배전에 박수치는 기도대나 고금의 교조(敎條) 조직은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이런 마취법을 동원했다.
바로 그 가무부대가 지난 주 대구에 왔다. 북한이 대구 유니버시아드에 300명의 여대생 ‘가무원정대’를 보낸 의도는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이들의 영양 좋은 얼굴, 화사하게 핀 웃음에서 어떻게 굶고 신음하는 북한 인민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 행복한 인민국가를 파괴하고 남북을 갈라놓으려는 자가 누구인가.
대구를 떠나며 북한의 장정남 선수단장은 우리는 “정치적 금메달을 목에 걸고 돌아간다”고 선언했다. 그 금메달을 안긴 것은 물론 한국 사람, 한국 정부이다. 북한 미녀들은 ‘통일이여 오라’를 노래하고, 그 춤에 어울린 남쪽의 동포는 ‘우리는 하나’를 찬미했다. 과연 이들은 어떤 통일을 노래하고 어떤 하나를 찬미한 것인가. 북한에 그들의 체제와 지도자를 버릴 통일이란 ‘어떤 경우’에도 없다. 이성(理性) 활동이 마비돼 무조건 환호하는 것은 남쪽이다.
그런데도 이창동 장관은 “우정과 화합을 위한 스포츠 제전을 정치적인 목적에 이용”한다고 국내 단체들을 경고했다. 이것은 무슨 환각증세인가. 북한의 안중에 동참한 지구촌 선수들이 있어서 대회 내내 보이콧 위협을 일삼았다고 장관은 생각한 것인가. 북한 응원단만 넋 잃고 따르던 관중, 이들만 비춘 카메라, 텅 빈 다른 경기장은 북한이 그들 말대로 어떤 ‘승전의 마당’을 펼쳤는지를 말해준다.
명색이 세계 젊은이의 체육제전이라고 차려 놓고 당국은 북한 선수단의 행보에만 일희일비했다. 그들이 안 온다면 놀라고, 돌아간다면 사과했다. 170여 다른 국가에서 온 선수들은 한민족 행사의 들러리가 됐을 뿐이다. 지난주 대구시가 주최한 것이 과연 국제 스포츠 제전이었는지 돌이켜볼 일이다.
3주전 우리는 평양에서 개최된 KBS 노래자랑을 보았고 이어 북한 응원단을 보았다. 현 정부의 취향으로 보아 이런 식의 남북 교류는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 같다. 이런 행사 때마다 으레 비용은 전액 남쪽 부담이고 덧붙여 상당한 ‘선물’까지 보내야 했던 것은 알 만큼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북한은 이념으로 무장된 ‘국가예술단’을 보내고 남한의 민간 단체는 동포와의 만남에만 들떠 있다. 이런 비대칭의 집단이 한 바탕 어울린 뒤 남쪽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연출된 화면 속에 북한은 미화되고 남쪽은 대북 온정주의만을 키운 것 아닌가. 그리하여 반미 감정은 쌓이고 경제, 고용과 안보에 위협만 증대된 것 아닌가.
스포츠나 문화 교류는 분명히 한반도 평화 증진에 도움이 되는 행사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호 상대를 배려하는 이성적인 당사자가 만날 때의 일이다. 무작정 확산시키는 문화 교류는 북한에는 대남 선전장터를 제공하고 남쪽에는 이념적 갈등만 생산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돈 주고 독을 사는 어리석은 자의 놀음일 것이다.
/ 김영봉 중앙대 경제학 교수
기사 게재 일자 2003-09-03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309030101061419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