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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8.09 21:37 / 수정 : 2009.08.12 10:03
- ▲ 김영봉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생계형 반칙'을 봐준다지만 결국 국민만 타락시킨다
이제 법치(法治)는 기로에 섰다
현 정권은 이를 바로잡을 시대적 사명을 잊었는가"
매년 광복절에는 대량의 범법자들이 사면된다. 작년 이명박 대통령은 재벌기업회장, 정치인 등 34만여명을 8·15특별사면 하면서 "새 정부 출범 후에 빚어진 범법 행위에 대해서는 일절 사면복권이 없을 것"임을 천명한 바 있다. 그러나 금년 "오로지 생계형 사면"이라며 다시 농어민·서민·자영업자·음주운전자 등 범법자 150만명을 사면한다. 과연 내년 8·15에는 아무런 사면복권이 없을 것인가?
주지하다시피 대통령 사면권은 과거 임금님이 베풀던 사면령(赦免令)과 같은 것이다. 1776년 토머스 페인은 그의 유명한 책 '상식(Common Sense)'에서 "절대정부에서 왕이 법이었던 것과 똑같이 자유국가에서는 법이 왕이어야 한다. 아무도 그 이상이 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법치(rule of law)라 함은 "누구도 법 위에 없고, 누구에게나 법이 적용됨"을 의미한다. 원칙적으로 국민주권국가에서는 사면받는 자도 사면하는 자도 존재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국가의 사면은 어떤 숭고한 목적을 담건 최소로 행사됨이 마땅하다. 미국은 지난 20년간 3명 대통령이 총 709명을 사면했으나 그때마다 논란이 들끓었다. 그러나 우리 대통령들은 제왕처럼 사면잔치를 벌였다. 이 정부는 두 차례 8·15사면 말고도 작년 6월 출범 100일을 맞는다며 283만명을 특별사면 했다. 필자가 집계해보니 김영삼 정부는 총 704만명, 김대중 정부는 1038만명, 노무현 정부는 438만명을 사면·감면·복권했다. 불과 17년 만에 2650만명을 풀어준 것이다!
이런 문란한 사면행위를 보면 과연 우리가 법치국가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의 사면은 분명히 그가 지키기로 선서한 법치를 찢는 행위다. 대통령이 법 위에 서면 국민 개개인도 자신의 법을 내세울 유혹을 받을 것이다. 야당, 민노총, 시민단체와 전교조의 막무가내 독선이 언제부터 극성했는가? 인간에게 범법, 탈법의 유혹은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사회에 엄밀한 법망(法網)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구의 과반이 범법자가 되고 또 풀려나는 나라에 법망이 무슨 소용인가? 정부가 스스로 법치를 찢으면서 국민에게 준법의식을 요구할 수 있는가?
우리나라에는 이른바 "생계형 범죄자"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대통령들이 "생계형 구제"를 통치자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이를 비판 못 하게 하는 사회적 금기(禁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정집단을 추려내 법의 윗자리에 세우는 나라는 이미 법치를 말할 자격을 잃는다. '법 앞에 모두가 평등'이라는 법치의 기본명제를 죽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시장체제는 시민이 그 규칙을 믿고 생활의 경기를 뛰어 그가 뛴 만큼 과실을 거두어가게 하는 질서다. 따라서 국가가 이 체제를 유지하는 한, 서민지원은 그들의 경기력을 높이고 사후에 부족한 수확을 보태주는 데 그쳐야 한다. 부자건 빈민이건 반칙을 허용해 경기결과를 조작시키면 법치는 독재나 왕정보다 하나도 나을 바 없는 타락한 질서가 된다.
통치자들은 서민 약자를 위한다며 법치를 풀어주지만 그 사이 생계형 범죄는 서민의 권리가 됐다. 비료로 콩나물을 키워 팔다가 잡힌 자, 맨홀을 가져가 팔아먹은 자 모두 TV에서 "먹고 살려고 한 짓"임을 당연하다는 듯 밝힌다. 범죄자는 범죄자를 기를 것이다. 부모가 음주 운전하면 아들이 음주운전을 배울 것이다. 큰 도둑놈은 국고나 부호를 훔치지만 잔챙이 서민범죄자가 풀려나면 다시 잔챙이 서민을 등쳐먹을 것이다. 서민은 우리 사회 법의식, 법치사회를 만드는 기층(基層)이다. 이들이 범법자가 되면 법 무시하는 국회의원을 뽑고 대통령을 그들의 편으로 만들 것이다. 나라는 수치스러워지고 오염된 서민은 늘어난다. 이것이 진정 서민과 약자를 위한 정치인가?
오늘날 지구촌사회에서 궁극적으로 서민과 약자를 돕는 길은 이들에게 공정한 자유질서 아래 경쟁할 수 있는 기회와 힘을 길러주는 데 있다. 그들에게 법치를 가르쳐 그와 자손을 정직한 시민으로 키우고 정직한 시민이 승리하는 자유민주주의 시장체제를 만들어 국가경쟁력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법치는 기로에 서 있다. 우리는 아직까지 국회의원들이 법질서확립을 독재정권의 탄압행위로 규정하고 바로 전 대통령이 "그놈의 헌법," "정당하지 않은 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할 만큼 반(反)법치주의가 팽배한 나라다. 이 수렁을 빠져나와 법치 문명국을 이루는 과제가 얼마나 험난하고 강철 같은 국가지도층의 결단을 요구하겠는가. 슬픈 사실은 현 정권이 이런 시대적 사명조차 아직 모르는 듯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