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칼럼

[시론] 말 없는 다수를 보는 총리가 되시라

yboy 2009. 9. 30. 11:40

 

조선일보칼럼 2009/09/30 23:07

[시론] 말 없는 다수를 보는 총리가 되시라

  • 김영봉 중앙대 명예교수·경제학과
  • 입력 : 2009.09.30 00:04
김영봉 중앙대 명예교수·경제학과

더 이상 독재시대 악법이나 민주주의 결핍은 존재하지 않는다
품격 사회를 희망하는 그 두터운 계층을 잊지 마시라

정운찬씨가 야당이 퇴장한 가운데 국회의 임명 동의를 얻어 새 국무총리가 됐다. 새 총리는 앞으로 "강한 경제와 통합된 사회를 만드는" 총론 이외에 세종시, 4대강 개발 등 거대한 논란거리 과제들을 다뤄야 한다. 반면 그의 앞길에는 "식물 총리가 될 것"이라는 야당의 다짐이 예고하듯 정계, 좌파, 우파의 비난과 방해가 넘칠 것이다. 정 총리가 이 중대한 시점에 훌륭한 역량을 발휘해 국가통합발전의 기반 마련에 큰 역할을 하고 자신의 가치도 높이기를 바란다.

1980년 겨울 필자는 정운찬 교수와 같이 2박3일간인가 판교의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소양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신군부 정권이 모든 신임 교수에게 요구한 국가관 교육인데, 마지막 날 우리는 합숙교육 성과를 평가하는 회의장에 모였다. 정 교수는 차례가 오자 사회자에게 질문했다. "이렇게 교수를 가두고 교육시키는 데 정부 예산을 쓰면 정권에 득이 되겠는가, 역효과가 나겠는가?" 그때가 얼마나 살벌했던 나날인가. 상황에 굴하지 않고 소신을 말하는 이런 담력이 오늘의 그를 존재케 했을 것이고, 향후 총리직을 수행하는 힘이 될 것이다. 지금 야권의 '변절' 오명을 받으며 국가 일을 맡은 새 총리에게 가장 필요한 자산은 불굴의 '용기와 소신' 아니겠는가.

세종시는 이제 정 총리를 상징하는 단어가 됐다. 그는 여당 정치인들이 기피했던 이 도시 수정 문제를 끄집어내 국론의 중심에 섰고 여기에서 좌초하면 국정의 리더십을 잃을 것이다. 국가의 기본기능인 정치행정기구를 두 쪽으로 나누려는 세종시 사업은 말할 것도 없이 국가 장래 대계(大計)가 걸린 문제다. 오늘 해결 못하면 20년 뒤 30년 뒤 다시 복구하는 거대한 숙제를 남길 것이며 이에 대처한 국정책임자들의 행적도 같이 남을 것이다. 여당이 국정 책임을 지는 정당이라면 지금부터 당리(黨利) 계산을 멈추고 총리의 노력을 100% 지원해야 할 것이다.

정 총리는 임명이 확정된 후 "가마를 타면 가마꾼의 어깨를 먼저 생각하라"는 어머니 말씀을 특별히 소개했다. 그가 서민과 사회적 약자의 배려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며, 이를 사회통합의 요체(要諦)로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청문회에서는 "다른 것보다 우선 용산참사 유족들을 만나 위로하고 실상을 파악하겠다"고 밝혀 그 해결에 적극 나설 뜻을 보였다. 그러나 그가 다른 좌파들과 구별되는 점은 "민주주의 후퇴, 인권탄압" 같은 상투적 비난을 자제한다는 것이다. 그는 중도·개혁 성향 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촛불집회, 미디어법 성명, 공안통치 공박 같은 좌파지식인의 언동에 휩쓸린 적이 없다. 새 총리가 이렇게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질서를 몸으로 이해하는 한 우리는 노선의 차이가 있든 없든 그의 국정운영에 신뢰를 보낼 수 있다!

오늘날 한국의 국정 수행자들이 근본적으로 가져야 할 것은 문명사회를 지탱하는 3개의 축, 곧 민주주의·시장경제·법질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다. 시장경제는 국민의 재산과 자유를 늘려주고 국가번영을 이끄는 기본제도로서 이미 역사적 판정이 났다. 이 질서가 정당하기 위해서는 시장의 경기자, 곧 국민이 법제도를 만들고 위정자를 뽑아야 하니,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법이 안 지켜진다면 민주시장체제는 범법자·난폭자가 힘을 쓰는 무법사회에 불과하니 산적(山賊)의 체제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민주주의와 법질서는 지난 반세기간 축약된 성장과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심하게 왜곡됐다. 관(官) 주도 경제운영시대를 거치며 정부가 성장에 참여하는 자와 소외되는 자를 갈라놓았고, 법과 공권력은 가진 자의 편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따라서 법을 안 지키고 공격하는 것이 정의·민주화운동으로 표방됐으며 불법·범법이 시민의 일상사에 파고든 것이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은 좌파·운동권·노동자들이 주도했고, 그 뒤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지나며 '민주와 인권'은 이들 집단이 독점하는 관념이 됐다. 그들의 권익과 사상을 침해하면 무조건 독재, 반인권세력으로 타도할 대상이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독재시대의 악법이나 심각한 민주주의의 결핍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정 총리는 알 것이다. 또한 우리 사회 내 자유, 권리와 사상이 지켜지고 품격 있고 번영하는 선진사회로 발전하기를 희망하는 두터운 사회계층이 있음을 알 것이다. 그들은 침묵하지만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키는 힘을 보여주었다. 사회통합이 모든 다양한 집단의 가치를 수렴하고 지켜주지 못하면 당연히 또 다른 사회갈등이 잉태된다. 글로벌 경쟁사회에서 궁극적으로 서민과 약자를 돕는 길도 그들을 정직한 준법시민으로 키우고 정직한 자가 승리하는 자유민주주의 시장체제를 만들고 국가경쟁력을 키우는 데 있을 것이다. 이 진정한 국민통합과 국가 만년 번영의 기반을 만드는 일에 서민 총리인 정운찬만 한 적격자가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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