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봉 중앙대 교수·경제학
노무현 대통령은 재신임 국민투표를 요구하며, 그로 인한 정국혼란이 “지난 8개월 동안의 혼란보다 더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그가 말하지 않는 사실은 지난 8개월의 혼란이나 투표기간의 혼란이나 모두 그가 일으킨 것이라는 점이다.
48%의 지지를 얻어 당선된 이래 노 대통령은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될 의도를 보이지 않았다. 자기 집단이 아닌 자는 모두 거부했다.인터넷 매체와 공중파 방송은 내 편이라 좋지만, 비판적 신문이 존재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 어느 민주사회에나 대통령의 매체를 좋아하는 시민이 있고, 조·중·동(조선·중앙·동아일보) 같은 매체를 선호하는 시민이 있지만, 우리 대통령은 국민이 선택한 이런 언론시장을 존중할 수 없었다. 비판적 매체와 소비자는 무시하고 제거할 대상으로 본 것이다.
노 대통령은 또한 국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대한민국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국회의 동의를 구해 국정을 수행해야 한다.현재 야당이 장악하는 국회 또한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준 국민이 선택한 것이다. 국회가 발목을 잡았는지 여부는 국민의 판단에 맡기고 최소한 내년 총선까지는 원내 지지세력을 키우든지, 야당 도움을 요청하든지 최선을 다해 국회동의를 구하는 것이 민주국가 대통령의 할 일이다. 그런데 우리 대통령은 그의 작은 지지정당도 스스로 쪼개 도대체 일을 못하도록 만들었다. 비우호적 국회라면 사보타주할 대상으로 본 것이다.
기존의 법질서도 무겁게 보지 않았다. 그보다는 타협과 원숙한 대응으로 대통령의 사회정의관을 실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의 뜻이 통하지 않는 사회적 틀은 바꿔야 하고, 이에 동의하지 않는 시민 언론 국회는 개혁할 수수세력으로 간주했다.
국민투표는 이렇게 현존하는 시장과 제도, 사회규범을 인정하지 못하는 대통령이 내놓은 도전이다. 국민에게 직접 신임받는 대통령이라면 국회탄핵 같은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일부 논의되는 위헌성 여부에도 무게가 실릴 수 없다. 이런 법적 논의를 이해할 국민도 없고, 야당 또한 그동안 원칙 없이 오락가락하는 행태를 보여주지 않았는가. 국민에게는 야당이 도생할 길을 찾는 패배주의자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오 늘날 우리 사회의 금기(taboo)는 사정없이 깨지고 있다. 과거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북한찬양이나 간첩포용을 공공연히 주장하더니 급기야 “홍위병이 되겠다”는 선언이 나올 지경이 되었다. 건국 이래 한국사회가 쌓아온 법질서, 시민관념, 사회정서가 이 시대에 모두 도전의 대상이 된 것이다. 역사를 되돌려 대통령이 국민투표 제청을 했으니 이제 정치적 고비마다 대중의사를 묻는4700만의 민중국가시대가 온 것인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여론조사에서는 대통령의 지지율은 바닥인데 투표에서는 대승할 것이라고 한다. 늙고 무능한 야당이 대안(代案)부재를 만들고 그래서 불신임을 주저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국민투표의 실시 여부에 불구하고 야당도 빨리 전열을 정비해야 한다. 큰 기대는 못하지만, 이것을 환골탈태의 기회로 삼아 당당한 패배자가 될 각오 아래 과거의 모든 비리를 고백하고 신진대사의 의지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 기백도 없다면 야당은 내년 총선에서 아무리 큰 몸체를 갖더라도 때마다 국민의사를 업고 나오는 쥐꼬리만한 여당에게 오늘같이 유린당하는 신세를 못 면할 것이다.
무시당하는 신세이면서 정국불안을 볼모로 신임투표를 강권하니 재신임을 지지하겠다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불신임으로 나타날 정국불안은 안 되고 남은 임기 4년 동안 끌려 다니는 것은 괜찮다는 말인가.캘리포니아 주민들은 무능한 주지사를 당장 소환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들이 주저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하는 만큼 대우받기 때문이다.
(김영봉 중앙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