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개발과 성장
1948년 8월 15일 탄생한 대한민국의 경제체제는 학술적으로 정의하면 ‘자유기업 자본주의 시장경제[Free Enterprise Capitalist Market Economy]’이다. 이는 국민 개개인이 사유재산권을 가지고, 이에 기반 하여 자유의사에 따른 경제적 의사결정을 하고, 그 경제활동이 시장에서 조정되어 생산, 분배 및 국민 상호간의 경제적 관계가 이루어지는 경제 질서다. 요약하면, 개인과 사회적 후생의 현재와 미래가 기본적으로 국민 개인의 자유와 책임에 의거한 활동에 맡겨지는 국가임을 의미한다.
한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자본주의를 선택한 1940-50년 당시 신생 독립국 대부분은 공산주의가 되거나 제 3 세계 사회주의 정치-경제 양식을 선택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는 아직도 독제체제에 갇히거나 빈곤한 후진국을 못 면하고 있다. 반면, 독립 이래 우리나라는 6.25 동족상잔의 전쟁과 미국원조 하의 처절한 생존과정을 거치면서도 이 정치경제체제를 지켜왔다. 이후 1960-70년대의 경제발전과 자립경제 형성, 1980년대 민주주의정치의 완성, 외환위기 이후 21세기 글로벌 경쟁력을 가지는 국가로 대두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경제적 갈등이 심화되며 빠른 속도로 복지 및 평등 지향의 국가로 이행하고 있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경제적 역사에 대해서 두 개의 다른 사회적 평가가 존재한다. 그 하나는 아프리카 수준의 굴종과 빈곤에서 탈피해 오늘날 세계가 놀라운 눈으로 보는 자유와 번영의 나라를 만들었으며, 이 경제체제가 생성하는 강인한 국민의 힘이 지금의 글로벌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생존 및 발전하고 자유를 신장하는 토대를 이룬다는 관점이다. 다른 하나는 분단의 고착, 식민지잔재의 미 청산 등으로 원래 잘못 태어났고, 지금 기득권 보호, 약자 소외, 양극화를 초래하는 불골정한 체제라는 관점이다.
한 사회가 진보하려면 국민, 특히, 미래시대의 주인공인 청년들이 지나간 역사에 대하여 공(功)과 과(過)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공정한 평가가 당면하는 우리의 현실과 과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자신과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정치와 제도를 요구하게 한다. 이러한 역사 인식을 돕기 위하여 다음에 대한민국 경제가 거쳐 온 60여 년간의 과정을 서술한다.
1, 일본제국주의[일제] 정책과 미국 군정(軍政)의 유산
1945년 일제가 물러간 후 남한은 농경 위주의 불균형적 자본주의경제를 물려받았다. 일제는 합병된 조선을 일본경제에 보완적이고 만주(滿洲)와 대륙 진출에 교두보 역할을 하는 ‘일본의 부속경제’로서 키웠다.
이 일제 지배의 역사는 긍정적, 부정적 측면을 모두 가진다. 가장 중요한 긍정적 효과는 조선의 전통적 봉건사회가 일거에 붕괴되고, 당시 일본이 속하였던 근대적 자본주의사회로 급격히 이동하게 된 것이다. 비록 일제의 식민지 경영을 위한 강제적 선택이기는 하였지만 한반도에는 근대국가의 행정 및 사법체계, 이에 따른 사유재산제도가 일시에 도입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시장제도, 재정금융제도, 교육제도 등 근대적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할 제도, 조직과 기관들이 이식(移植)되었다.
일제는 또한 대륙의 통로에 있는 조선을 영구적으로 병합하고 이용할 목적으로 경부선, 경의선 등 철도 건설과 도로, 통신, 항만 등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조선 자본주의의 물적 토대 형성은 주로 일본의 식민지 정책 및 대규모 일본자본의 유입에 의존하였다. 따라서 일제 하 조선은 기본적으로 농업사회로 남아있었으며, 조선인 기업과 자본은 이제 막 형성되는 수준이었다.
일제는 조선에 이른바 ‘남농북공[南農北工]’의 산업정책을 펼쳐 대륙에 가깝고 지하자원이 풍부한 반도의 북쪽은 공업 생산지역으로 육성하고, 온난하며 일본에 가까운 남쪽은 미곡 중심의 농업 생산과 섬유와 약간의 경공업제품 생산에 치중되었다. 해방직전 한반도의 전력의 92%, 철광석의 98%, 유연탄의 87%, 금속산업의 90%, 화학산업의 82%가 북한에서 생산되었으며 [이주영 등 2007]. 이 식민지 경영정책의 결과 해방 후 남한에는 당초부터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하고 외국에 의존해 생존할 수밖에 없는 경제구조가 남게 되었다.
일제에 이은 미군정 3년간[1945.9-1948.8]은 대한민국이 태어나는 발판을 마련한 기간이다. 우선 남한사회에는 산업생산의 공백과 더불어 약 220만 명의 해외동포 귀환자 및 북한에서의 월남 인구가 유입되었다. 이로서 격심한 식량 및 생활물자 부족, 실업사태가 몰아치게 되었고, 살인적 인플레이션 속에 1945년 8월~1947년 말 기간 쌀 가격은 6.9배, 필목[옷감]값은 68.0배, 시멘트는 100배가 올랐다. [조선경제연보 1948]. 당시 남한의 재정 중 조세수입 비율은 1946년 6.1%, 1947년 18.5%, 1948년 14.6%에 불과하였으므로 (한국산업은행조사부, 1955: p.360). 남한의 생존은 거의 미국의 원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 기간에 미군정은 ‘점령지역 행정구호 원조’[GARIOA; Government and Relief in Occupied Areas]를 통해 약 4억9백만 달러의 식량, 비료. 석유, 석탄, 피복류, 의약품, 건축자재 등을 도입함으로서 당시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던 생필품을 조달하였다.
일본을 대체하여 미국과 소련의 점령군이 들어옴으로서 한반도의 남과 북은 이제 새로운 정치적 여건 하에 새로운 정치경제체제를 선택하게 되었다.
남한에 들어온 미군정은 일제 말 구축된 전시 통제경제체제를 폐지하고 근대적 시장경제질서 도입을 촉진하였다. 당시 일본인이 물러간 대부분의 공장에서는 노동자위원회가 조직되어 ‘자주관리운동’이 확산되었는데 미군정은 이들의 기업경영권 간섭행위를 금지시켜 자주관리운동이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조선총독부 말기에 시행된 미곡배급제를 철폐하고, 생활물자에 대한 생산 및 가격통제를 풀어 시장기능에 맡겼다.
이러한 미군정의 존재는 남한으로 하여금 당시의 이념적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고 서구적 자유민주주의 정치제도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이념과 제도를 이어갈 수 있게 하였다. 당시 미군정이 우리 국민의 체제 선호도를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86%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선호하고 자본주의는 14%에 불과하였음을 보여준다 [이길상 1998]
해방 후 이러한 역(逆) 조건에서 이루어진 남한에서의 선택이 얼마나 고마운 행운이었는가는 그 반대의 선택을 한 북한의 역사에 비교해 알 수 있다. 소련이 점령한 북에서는 일제의 전시통제 경제체제가 더욱 강화되었고, 북조선공화국의 공산주의체제로 이어졌다. 북한은 1946년 “일제가 시행한 모든 법을 폐지한다,” “일제의 재판기구를 인민재판기구로 대체한다”는 내용의 ‘건국 20개 조항’을 발표하였다. 이로서 북한에서는 일제를 통해 들어온 근대사회의 사유재산권과 재판권은 폐기되고 일당독재와 공산주의제도가 이를 대체하게 되었다.
이 체제 선택의 결과 북한은 아직까지 전 세계가 보는바와 같은 빈곤과 억압의 나라로 남게 되었다. 북한은 남한에 비교할 수 없이 풍부한 물적 유산을 일제로부터 물려받았고 인구는 남한의 1/2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남한에 대한 경제적 우위는 1970년대 초반까지만 유지되었다. 이후 남북 간의 격차는 더욱 크게 벌어져 2011년 기준 북한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단지 남한의 1/38에 이른 것으로 평가된다[김천구 2012].
2.이승만 정부의 과제;
이승만 시대는 좌익의 반란, 6.25전쟁, 처절한 가난, 북으로부터의 위협이 계속된 환경 아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를 확고히 구축한 시대로서 의미를 가진다. 1948년 제헌헌법은 국민주권의 민주주의를 선포하고 국민의 재산권을 보장하였다. 이로서 대한민국은 자유주의, 국민주권, 사유재산, 시장경제 등 문명사회의 구조를 가지는 서방세계의 일원(一員)으로 출발을 하게 되었다.
농지개혁;
초기 이승만정부의 과제는 이런 국가체제에 맞는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농지개혁과 일제 귀속재산의 불하가 신속히 이루어졌다.
해방당시 남한은 인구의 7할 이상이 농민이었고 이 중 80% 이상이 소작농인 농업국가이었다. 이 신생국가를 맡은 이승만 정부에게는 국민의 절대다수인 농민들에게 자립적 생존기반을 만들어주고 이들의 정치적 지지를 끌어 모으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제헌헌법에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규정을 마련하고, 1950년 3월 ‘농지개혁법’을 선포하였다.
이 농지개혁은 비록 ‘유상분배 유상몰수’ 방식이었지만 당시 초고속의 인플레 상황으로 지주에게 지불한 ‘지가증권’의 가치는 거의 휴지처럼 절하되었다. 반면에 토지분배는 년 소출량의 150%를 5년간 분할 상환하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소작인에게는 절대적으로 유리하였다. 따라서 이 개혁은 자본주의 기본원칙인 ‘사적 재산권 보호’를 크게 훼손시키는 조치이었지만 신생국가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기반 구축을 위한 결단이라는 점에서 당위성을 가졌다. 이 농지개혁은 혁명적인 부의 재분배를 일으킴으로서 신생국의 소득 불평등을 크게 완화시켰으며, 6.25전쟁과 그 이후의 정치적 경제적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에 대하여 당시 사회주의 세력은 북한에서 시행된 토지개혁‘무상몰수·무상분배’ 형식임을 비교하여 남한 농민에게 훨씬 불리함을 선전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토지분배는 사실상 경작권은 나누어 준 것에 불과하였으며, 이후 모두 회수하여 집단농장으로 전환되었다. 결국 북한의 토지분배는 국가가 토지를 다시 빼앗아 독점 소유하고 농민은 국가의 토지를 경작해주는 과거 ‘소작농’의 형태로 회귀하게 된 것이다.
일제 귀속재산의 불하;
정부수립 이전 미군정은 일본인이 남기고 간 공장, 회사, 금융기관, 광산 등을 미군정의 소유로 귀속시키고, 일부 귀속재산은 불하(拂下) 처분하였다. 미군정 후 대한민국 정부가 인도받은 이 귀속재산의 순자산가치는 3000억 원에 해당해 당시 정부예산의 10배에 달하였다[이대근 2002].
이승만 정부는 1949년 귀속재산처리법을 제정하여, 이중 몇 개 기간산업체만 국공유기업체로 지정하고 나머지는 불하하여 민간소유로 전환시켰다. 이 귀속재산의 과감한 불하는 초기 한국의 시장경제에 생산기능을 담당할 민간 기업을 생성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반면 정부가 정부재산을 특정기업인에 유리한 조건으로 불하하여줌으로서 이때부터 한국자본주의에는 정부-민간의 유착관계가 고질(痼疾)의 문제로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6.25전쟁 피해와 미국의 원조;
1950년 6.25전쟁은 건국 후 2년이 안된 대한민국의 국토, 산업과 국민의 생활을 철저히 파괴하였다. 군인, 민간인 등 수백만이 사망한 것 이외에 걸인, 고아, 과부, 상이군인들이 무수히 생겨났다. 물가는 1950년 167.5%, 1951년 390.5%, 1952년 97.5% 뛰었으며, 절량(絶糧)농가, 판잣집, 노천교실 등 국민의 생활상은 비참하기 이를 바 없었다. 전쟁에 의한 국민 재산과 사회간접자본 피해는 사실상 계산이 불가능하였으며, 당시 정부는 남한의 공장건물의 44%, 기계시설의 42%, 발전설비의 80%, 주택의 약 40%가 파괴된 것으로 집계하였다[공보처 1954].
이렇게 경제가 붕괴된 상황에서 휴전 후 경제 복구는 물론 국민의 생존 자체를 미국의 원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946-78년간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받은 경제 원조 총액은 60억 달러였는데 이는 같은 기간 아프리카 전체 원조액 69억 달러에 비견되는 규모였다[한국경제 60년사 편찬위원회 2010]. 1954-59기간 중 한국의 총 수입(輸入) 중 원조 수입의 비중은 무려 74.8%에 이르고, 정부의 총 세입 중 미국정부 원조자금의 환(圜)화 환산 수입인 대충자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44.8%나 되었다 [이주영 2007].
따라서 1950년대 한국경제는 한 마디로 ‘원조 경제’라 이를만하며, 이 원조 덕분에 휴전 후 산업생산과 국민생활은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농작물 작황에 크게 의존하던 GDP 증가율은 1954-59기간 년 평균 4.3% 성장하였으며, 제조업은 년 11.9%의 높은 성장을 보였다. 살인적인 물가 상승은 1956-57년 년 20% 대로 안정되고 1958년에는 소비자물가가 오히려 –3.5%로 하락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원조는 우리 경제에 밝은 면과 함께 어두운 면을 함께 뿌렸다. 당시 급박한 민생 구제는 이루어졌지만 경제는 소비재 생산과 유통에만 의존하는 취약한 구조에 빠지게 된 것이다. 당초 이승만 정부는 1948년에 기획처, 1955년에 부흥부를 설치하고, 5차례의 경제부흥계획을 세우는 등 미국의 원조자금을 2차 산업 확대와 철강, 시멘트 등 기간산업 건설에 투입함으로서 자립경제기반을 구축하기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부패, 무지, 무질서 등에 찌든 한국이 독자적 공업화와 자립경제를 이룰 나라로 믿지 않았다. 미국의 의도는 일본을 동아시아 자유진영 경제의 축으로 키우는 것이었으며, 한국은 일본의 산업화를 도울 공산품 시장이 되는 것으로 그 역할이 충분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따라서 이승만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개의 유리, 제련, 시멘트, 비료 공장 등 수입대체산업을 건설하는 것뿐이었다. 정부는 당시 유일한 외화수입이었던 유엔군에 대한 환(圜) 대여금에 더 많은 달러를 상환 받고 수입 물자를 낮은 가격으로 공급받기 위해 가능한 한 저환율정책을 썼다. 이와 함께 미국의 잉여농산물 무상원조계획[PL480]에 의한 원면, 밀, 원당 등 원자재가 저가에 도입됨으로서 면직물, 설탕, 밀가루 등 이른바 ‘‘삼백(三白)산업’이 공업생산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런 원조 및 저환율 경제는 단지 소비재생산과 그 유통과정에서만 부가가치를 창출시켜 원조시킴으로서 원조가 고갈되면 경제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취약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잉여농산물 도입은 농업에의 산업성장 효과를 차단시키고 농산품 가격하락을 유발하여 농민을 궁핍화시켰다. 이로 인해 농촌인구가 도시로 끊임없이 유입되고 전후 성년 인구도 급격히 증대해 도시에 실업자를 넘치게 하였다. 한편 저환율 정책은 수출산업을 저해시키고 수입달러를 배정받는 기업인에게 거대한 이익을 얻게 함으로서 정치-관료-기업 간 부정과 유착관계가 조장시키게 하였다.
비록 취약하고 자립구조가 결핍되기는 하였지만 1950년대 경제성장은 한국경제에 시장경제활동을 위한 기초적인 물적 기반을 갖추게 하였다. 이와 함께 이승만 시대에 자유시장경제가 토착하기 위한 국가안보적, 이념적 토대가 형성되었다. 이승만대통령의 외교력과 결단적 행동은 1954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이끌어냄으로서 우리 시장경제에 대한 북한의 침략위협을 결정적으로 축소시켰다. 동시에 이승만의 반공 정치는 빈궁하고 무지한 초기 한국사회를 공산주의자들의 이념적 도발로부터 지켜내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이승만 시대에 세계사적으로 ‘교육 기적’이라고 이를 만큼 거대한 교육의 성취와 인적자본 형성이 이루어졌다. 6.25 전후의 어려운 사정임에도 1954년 정부는 전 국민 대상의 6년 의무교육을 시행하였다. 해방직후 80%에 이르던 문맹률은 1958년 4.1%로 줄어들었다. 국가의 교육투자와 더불어 국민의 교육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으로서 1945~1960년에 걸쳐 초등학생 수는 163만에서 359만으로, 중·고등학생은 13만에서 78만으로, 대학생은 7,800에서 9만 8,000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교육투자가 짧은 시간에 국민의 지식, 기능 및 진취력을 방대하게 축적함으로서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과 1980년대 민주화 추진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1950년대 말부터 미국의 원조가 급격히 감소함으로서 한국경제에도 격심한 침체가 시작하였다. 국민의 좌절과 불만이 쌓이는 가운데 권력층은 부정, 부패, 비리에 깊숙이 빠졌으며 급기야 1960년 3.15 부정선거가 저질러졌다. 그 결과 4·19혁명이 일어나고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났다.
이어 등장한 민주당 정권은 분열되고 무능하였다. 갑자기 맞이한 민주화로 모든 사회적 갈등과 요구가 터져 나왔고 민주당정부 10개월간 2000여건의 시위가 발생하였다. 정부는 이런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를 통제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밀수, 깡패 등 불법과 공산화 위협이 횡행하는 사회에 드디어 도래한 것이 젊은 장교들의 5.16 군사정변이다. 이들에 의해 강력한 정부가 형성되고 경제개발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3, 박정희 정부의 경제발전
우리나라는 박정희 정부 하의 이른바 ‘개발연대[1965-1979]’에 세계에 유례없는 비약적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경제는 년 10% 이상으로 성장하고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962년 87달러에서 1979년 1,674달러로 증가하였다. 수출은 1962년 5,500만 달러에서 1979년 150억 달러로 275배 신장하였다. 경제성장과 함께 중공업과 경공업이 균형을 이루는 산업화를 이루어 자립경제구조가 구축되었다.
1961년 5.16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박정희 장군은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 해결과 국가자주경제재건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혁명공약에 내걸고 그의 집권기간 내내 경제개발과 산업화를 국가의 최우선 목표로 추진하였다.
정부주도의 경제개발;
이 시대의 고도성장은 강력한 ‘정부주도 경제개발’로 이루어졌다. 정부는 3차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76]’을 수립하였으며 제 4차의 ‘경제개발 및 사회발전 5개년계획[1977-81]’도중 박대통령의 사망으로 전두환 정부로 이양되었다. 5개년 계획은 각 계획기간에 실현할 국가발전 방향과 경제정책지침을 설정하고, 이에 따라 년도별 투자배분과 그 재원조달계획을 세웠다. 계획을 달성하기 위하여 정부의 투자와 함께 강력한 조세, 금융, 무역 및 산업 정책과 제도를 도입하여 민간부문의 생산 및 투자활동을 국가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였다.
부족한 투자자원을 가지고 신속한 공업구조 개편을 원한 정부는 특정 산업을 선별하여 집중 지원 육성하는 산업정책을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기계공업진흥법(1967), 조선공업진흥법(1967), 전자공업진흥법(1969), 섬유공업근대화촉진법(1967), 석유화학공업육성법(1970), 철강공업육성법(1970) 등 7개 특정산업 진흥제도가 마련되었다. 이 법에 적용되는 업종과 기업체들은 희소한 투자재원의 배분, 우대금융, 조세감면 기타 행정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정부가 의도하는 산업구조와 기업의 대형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런 정부주도의 경제는 강력한 중앙정부의 힘과 경제개발 의지가 존재함으로서 추진될 수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이례적인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유지하였고, 국가 및 정부목표와 정책에 대한 조직적 반대를 허용하지 않았다. 모든 중요한 정책 결정은 대통령이 내리고 효율적인 관료가 정책 입안(立案)과 집행을 담당하였다. 국회는 실질적으로 이 과정에 배제되었다.
이 개발연대의 한국정부 형태를 국내외 학자들은 ‘경성국가[hard state]’로 규정한다[김만제 등 1981]. 스웨덴 경제학자 ‘뮈르달[G. Myrdal]이 정의한 경성국가는 비록 국민에게 인기 없는 의무를 지우더라도 필요한 정책을 수립하고 실천에 옮겨 경제개발을 성취할 능력을 가진 정부를 말한다. 반면 연성 국가[soft state]는 압력집단, 뇌물공여자, 범죄자들이 장악하거나 이들에 끌려 다녀 법, 제도, 절차 등을 실천할 능력이 없고, 국가기관이 지속적으로 권위와 신뢰를 잃는 국가를 말한다.
따라서 경제개발을 시작한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를 불러오는 등 민주주의 정치질서를 실종시켰다. 그러나 다른 후진국 독재정권이나 무능한 민주주의 정권과는 달리 그 통치력을 경제개발에 집중시킴으로서 당시의 시대적 과제였던 빈곤탈피와 산업화를 신속히 수행할 수 있었다. 이리해서 정부는, 제1차 5개년계획에서 년 7.1%, 2차 계획 7.0%, 3차에 8.6%의 매우 높은 GNP 성장률 목표를 설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성장률은 이를 훨씬 넘는 년 8.3%, 11.4% 및 11.2%를 실현할 수 있었다. 이런 강력한 경제성장은 한국경제의 자립기반 구축과 함께, 국민의 부와 힘을 키움으로서 1980년대에 도래할 민주화시대의 기반을 신속하게 형성하였다.
개발 재원의 조달과 한일협정;
경제개발을 최우선 목표로 내세운 박정희 정부에게 가장 절실한 과제는 그 투자재원의 조달이었다. 당시 베트남 전쟁에 깊이 빠져 들어간 미국은 대한(對韓)원조를 급격히 줄이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개발과 산업화 자금은 순전히 우리정부와 국민 스스로 조달해야 하였다.
따라서 1960년대 초반까지는 한국의 모든 경제정책과 제도를 정부저축과 민간저축 기능을 증대시키도록 혁신하는 시대였다. 정부는 국세청을 신설하고 부정, 탈세, 누세가 심하였던 조세 행정에 세원 확대, 세무감사, 세리(稅吏) 감독 등의 기능을 강화하였고, 이에 힘입어 1960-65년 평균 8% 수준이던 조세부담률을 1969-71년 평균 14.5% 수준까지 높아졌다.
한편 은행들은 물가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예금 금리로 거의 저축동원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이에 1965년 9월 1년 만기 정기예금금리를 29.4%로 올리는 등 획기적인 금리인상을 단행하였다. 이에 따라 1964년 말 GNP의 6%이던 예금은행 총예금이 1969년 29%가지 올랐다.
1965년 박정희 정부는 야당의 반대와 극렬한 학생 시위 속에 ‘한일협정’을 체결하고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이루었다. 이에 의하여 무상(無償) 3억 달러, 유상 재정차관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이상으로 구성된 대일청구권 자금이 도입되어 정권 초기의 개발계획 사업과 산업화를 수혈하는 귀중한 밑천이 되었다.
청구권자금 중 무상 및 재정차관의 51%인 2억5천만 불 이상이 포항제철 건설 및 그 원자재 구입에 투입되었다. 나머지는 경부고속도로와 소양강 댐 건설, 철도시설 개량, 농림수산업 및 광공업 육성에 사용되었다. 당시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는 국내외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쳤으나 박 대통령의 미래에 대한 비전과 강력한 집념으로 밀어붙여 관철된 것이다. 이 사업들은 이후 1970년대 산업발전을 지원함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일협정 체결은 우리나라 산업화에 실상 청구권 자금 이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이에 의하여 한국은 개방경제와 산업화의 길에 들어설 확고한 의지가 있음을 세계에 보여주었다. 이 협정 이후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투자 및 무역관계는 가속적으로 증대하고, 세계은행[IBRD], 아시아은행[ADB] 등으로부터의 자금지원과 기타 외국의 차관도입도 증대하게 되었다.
외향적 성장전략;
1960년대 경제개발의 시대를 시작하면서 박정희 정부는 이른바 ‘외연적 발전전략[outward-looking development strategy]’을 선택하였다. 이는 폐쇄적 자급경제 대신 적극적으로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 수출증대를 이루고 외국의 차관과 자본을 도입하여 경제발전과 산업자본축적을 하겠다는 전략이다.
이 전략은 지금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으로 보이나 당시 대부분 신생독립국들은 수입대체산업을 육성하고 착취적인 외국자본의 유입을 막아 대외의존도를 낮추는 독립적 경제[self-relianct economy]를 구축한다는 후진국 발전이념을 따르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대통령과 그 경제팀이 ‘수출입국(輸出立國)’의 이념을 세우고 과감한 외자도입으로 한국경제를 외연적(外延的)으로 확대시키겠다는 전략을 선택한 것은 참으로 대담하고 다행스러운 발상이었다. 이는 국내시장이 좁고 부존자원이 없으며 잘 교육받은 인력이 풍부한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발전할 기초를 닦는데 가장 합당한 경제 전략이었다.
1964년부터 정부는 총력수출지원체제에 들어갔다. 과대하게 평가된 원화가치를 달러당 130원에서 255원으로 절하시켜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을 강화시켰다. 당년 발표된 수출지원종합시책은 수출금융의 확대, 수출우대금융 및 조세감면, 기타 행정적 지원을 총 동원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매월 ‘수출진흥 확대회의’를 주재하고 전월의 수출동향, 실적 등을 점검하였으며 그 자리에서 수출업계의 애로(隘路) 및 건의사항을 청취하여 관련 장관에게 해결할 것을 지시하였다. 1964년 11월 30일, 수출액이 1억 달러를 이룬 날을 ‘수출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수출에 공이 큰 기업인 기술자 등을 포상하였다.
이리해서 1962년 5,481만 달러이던 수출이 1964년 1억1,906만 달러로 뛰었고 1971년 10억 달러를 넘었다. 1977년 100억 달러를 돌파하고 2011년 우리나라 수출입액이 1조 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1961년 최대 수출품은 철광석이었으며 10대 수출품목이 중석․무연탄, 쌀 , 생사(生絲), 오징어 등이었다. 이것이 1970년 의류, 가발, 합판, 신발 등 경공업 제품으로 바뀌고,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시작하면서 철강판, 선박 등이 되고, 1980년대에 들어 반도체, 전자제품 등이 주력 수출상품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당시 기업들은 전 세계를 누비며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듯 상품을 팔았다. 그 과정에 한국의 기업과 그 종사자들은 강인한 경쟁의 본능을 지니게 되었고, 오늘날 삼성 LG 현대 등 세계적 기업들이 탄생하였다. 경제개발 초기 ‘수출입국’ 이념의 선택이 없었다면 당시 고속 성장과 공업화는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중화학 공업화;
1973년 박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우리경제의 미래상을 제시하면서 한‘중화학 공업화’를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중화학기획단이 설립되어 자금동원, 공업단지 조성, 투자, 생산 및 수출계획 등을 구체적으로 수립 및 추진하였다. 이어 철강, 비철금속, 전자, 화학, 일반기계, 조선, 등 6개 산업이 전략적으로 보호·육성할 중화학 산업으로 선정되고, 이에 참여할 기업들이 지정되었다.
정부는 중화학공업화를 위하여 1960년대 수출증대를 추진하던 때처럼 동원 가능한 모든 정책수단을 동원하였다. 당시 대기업들은 전망이 불확실한 대규모 사업에 참여하기를 주저하였지만 참여는 거의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 많은 인센티브가 제공되었고 참여기업들은 사운(社運)을 걸고 전투를 수행하듯 중화학 투자와 수출에 매달렸다. 이 과정을 거치며 여러 기업들이 획기적으로 몸집을 불리어 이른바 ‘재벌 집단’이 형성되었다.
중화학 공업화는 경공업위주 수출에 성공한 한국경제로서는 투자의 위험도[risk]가 큰 도박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한국경제의 장래를 경공업과 가공제품 수출에만 의존할 수 없고 산업국가로 발전을 계속하려면 소재산업, 기간산업 등 중화학 부문에서의 수출과 이를 담당할 경쟁력 있는 대기업 육성이 획기적으로 필요하다고 보았다.
또한 방위산업 발전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당시 미국에 생존을 의지하던 월남은 곧 패망할 것이 확실해 보였으며 닉슨 독트린에 따라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가 진행되고 있었다. 한편 북한의 도발은 더욱 증가하였고, 북한의 경제력, 특히 중공업 생산능력은 남한을 크게 압도하였다. 이런 국가안보의 불안 속에서 중화학 공업화는 무엇보다 방위산업 조성을 위해 필요하였다. 197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유보하고 국가 자원을 총동원 하겠다’는 ‘유신(維新)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은 바로 두 달 뒤 발표될 중화학공업화를 강행할 초석을 놓은 것이다.
박정희 시대의 의미와 문제;
박정희 개발연대의 가장 큰 공헌은 말할 것도 없이 한국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연 10%의 경제성장과 년 19%의 성장이 이루어지고, 이에 따른 자본축적, 고용증대, 기술발전, 그리소 경제구조와 조직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다. 거리에 넘치던 실업자는 대부분 일자리를 찾았고, 과거 무력하고 의존적이던 국민은 능력과 자신감을 가진 국민으로 바뀌게 되었다.
1960년대 우리의 시대적 과제는 무엇보다 세계 최악의 수준이던 가난으로부터 탈출하여 인간답게 살아보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일컫도록 세계에 유례없는 경제발전을 이끌어냄으로서 이 과제를 완벽하게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 민주화, 인권, 분배 등 다음단계 시대정신이 꽃필 초석을 마련하였다.
이 시대 우리나라에는 재능 있고 교육받은 인적자원이 풍부히 있었고, 이들이 근로자, 기업인, 기타 사회적 생산자로서 능력을 다하였다. 한편 정권은 적절한 경제 전략과 정책의 선택, 정치적 안정과 강인한 지도력[leadership]으로 국민의 에너지를 경제발전의 동력으로 집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당시의 다른 후진국들은 거의 이 단계에서 주저앉았음에 비추어 볼 때 이 성과는 과장할 수 없이 위대한 과업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 주도의 경제운영은 국민을 경제성장의 수혜자와 소외자로 가르는 역할을 하였다. 수출, 산업근대화, 국산화, 중화학 등에 참여한 국민은 국가의 희소한 자원과 정책특혜를 배분받아 부(富)와 기회를 누리게 되었다. 노동조합활동이 통제됨으로서 근로자는 상대적으로 박탈당하는 집단이 되었다. 수많은 선별적 지원제도는 정경유착과 부패를 기르는 토양이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많은 국민에게 분배의 결과에 대한 불만과 상대적 불평등감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책이 참여자와 소외자를 갈라놓음으로 인하여 국민 간에는 ‘능력이나 노력보다 기회를 잘 포착하는 자가 성공한다,’ ‘내 탓으로 가난한 게 아니다,’ ‘출세하거나 부자가 된 자는 부럽기는 하지만 존경할 자는 아니다’라는 병적(病的) 사회의식이 자라나게 되었다.
한편, 법, 제도 및 정책의 수립 및 수행과정에 민주주의 절차가 결여됨으로 인하여 정부나 공권력에 도전함이 ‘민주주의 운동’이라는 왜곡된 행동양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한국사회에 준법 및 질서 의식이 결여되고 이기주의에 집착하는 양태도 나타났다. 한국경제의 물질적 토대는 초고속으로 형성되었으나 이를 지탱할 시민의식이 낙후됨으로 인하여 뒤에 한국사회에는 첨예한 국민간의 갈등이 대두하게 되었다. 소위 ‘개발독재’에 대한 이런 국민적 염증이 ‘10년간의 진보좌파정권’을 탄생하게 함으로서 이후 오히려 분배-평등 지향적 이념이 넘쳐나고 시장, 기업, 개방에 저항하는 사회적 의식이 번성하게 되었다.
4, 1980-90년대; 시장경제의 발전, 외환위기와 세계화의 전개
1979년 박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개발 연대’가 끝나고 한국경제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경제가 양적으로 크게 성장함으로서 산업구조는 고도화 및 전문화 되고, 이애 따라 사기업의 기획 및 적응 능력이 관료엘리트의 능력을 능가하게 되었다. 또한 기업내부의 축적으로 정부의 자원배분에 기반 한 통제능력이 약해졌다. 과거와 같은 정부의 개입과 지시는 오히려 자원배분의 왜곡, 기업의 경쟁능력 약화 등 역기능을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경제가 커짐으로서 고도성장의 시대는 끝나고 이제는 그간 쌓인 자원배분 편중, 인플레 압력, 대외적 환경변화에 적응함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1980년 한국경제는 정치적 혼란과 함께 제 2차 석유파동의 직격탄을 맞았다. 경제성장률은 -2%,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29%, 경상수지 적자가 52억 달러에 이르렀다.
제 5 공화국 전두환 정부의 과제는 당면한 경제의 불안정 요인을 불식하고 종래 정부주도의 경제운영 체제를 시장과 기업주도의 체제로 이행시키는 것이었다. 전두환 정부는 우선 물가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수많은 논란을 억제하고 강력하게 재정금융긴축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소비자 물가는 급격히 떨어져 1983년 이후 2%-3% 대에 이르게 되었다. 1986-88년대에는 저(低)달러, 저유가, 저금리의 3저(低)현상이 찾아와 경제성장률이 12%를 넘는 대호황을 누렸다. 우리나라는 이때부터 만성적 국제수지 적자에서 벗어나 흑자 누적국가로 전환하게 되었다.
1980년대 이후 자율적 시장기능의 확대를 위한 제도와 정책이 속속 도입되었다. 중화학시대의 7개 개별산업 육성법은 통폐합되어 종합적 간접적 지원의 형태인 공업육성법[1986]로 제정되었다. 한국의 금융부문은 그간 관치금융으로 인해 실물경제에 비해 심하게 낙후되었는데 1980년대 금융 자율화시대가 열리면서 민간 금융부문이 발전할 기회가 열렸다. 일반은행이 민영화되고 한미은행, 신한은행 등의 투자신탁사, 생명보험사, 리스회사, 카드회사 등 수많은 금융기관과 금융상품이 도입되었다. 이 금융자율화 바람은 뒤에 금융기관 외화 차입을 급격히 증대시켜 1990년대 말 외채위기 발생의 원인이 되었다.
1980년대 이후 정권이 정치적 민주화를 추진하면서 그동안 쌓인 경제적 불균형을 시정하고 소외된 부문을 지원하는 제도 도입이 속속 이루어졌다.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과 재벌의 과도한 소유 집중이 여론의 지지를 받으면서 1980년 독점규제와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이 제정되었다. 중소기업진흥장기계획(1982-1991)이 마련되어 중소기업의 육성과 보호를 위한 수많은 지원정책이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지역균형발전도 중요한 이슈가 되어 정부는 1982년 수도권 정비법을 도입하고, 수도권에 대기업과 대학의 신설 증설을 금지 및 억제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과거 적극적 투자의 시대가 마감되면서 경제성장 동력이 점차 시들게 되었다. 투자가 위축되고 고용은 늘어나지 않고 과거에 억압된 노동조합은 불법파업과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하였다, 노동시장에서의 유연성이 사라지며 기업의 수익성이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기업은 비정규직을 늘리고 외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기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한국사회에 양극화 논란이 일기 시작하였다.
1997년 외환위기;
이런 여건에서 김영삼 정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준비하였다. 1996년 12월 우리나라는 OECD의 정식 회원국이 되었으며, 그 가입조건을 충족하기 위하여 국내시장 개방, 무역거래 및 자본이동의 자유화 조치를 이행하였다.
이후 우리나라 은행과 국내 대기업의 싼 이자 해외차입이 급격히 늘어났다. 과거 한국의 괄목할 성장을 본 외국금융기관들은 한국의 대기업에 쉽게 융자해주었고 투자기회를 찾던 국제금융자본도 물밀 듯이 들어왔다. 갑자기 늘어난 금융기관, 특히 종합금융사의 차입이 급격히 증대하였다. 이들은 특히 빌리기 쉬운 단기외화자금에 몰려 이자차익을 취하고 국내기업에 대부하였다.
OECD 선진국이 되었다는 환상과 세계화의 분위기에 들떠 환리스크는 아무도 심각히 우려하지 않았다. 흥청이며 투자하고 소비하는 분위기 아래 1990-96기간 경상수지 적자는 487억 달러에 이르렀다. 기업들의 채산성은 급격히 하락하였지만 그 회계 관리는 불투명하고, 조작되었다. 대기업들은 정부가 급하면 언제나 구제해주리라는 대마불사(大馬不死)의 믿음을 가졌다. 한국경제는 몸체는 물론 정신까지 중병에 걸려있었다.
1997년 드디어 한보그룹, 기아자동차 등의 부도가 잇따르자 한국기업의 실체를 파악한 외국금융기관들이 경쟁적으로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하였다. 국제신용평가기관의 한국금융기관 신용등급 하락이 이어지고 우리경제는 온갖 악성루머에 시달려 걷잡기 어려운 공황사태에 빠졌다. 외환시장과 증권시장에서 달러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정부의 외환보유고는 바닥났다.
이렇게 우리경제가 부도에 직면하자 정부는 1997년 11월 21일 IMF[국제통화기금]에 210억 달러의 자금지원을 요청하였다. IMF는 이 지원 조건으로 한국의 정부, 기업, 금융, 노동 등 4개 부문의 구조조정을 요구하였다. 이로서 한국경제는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게 되었다.
위기 속에 발휘된 한국인의 저력;
1997년 말의 외환위기는 6.25전쟁 이래 가장 큰 경제적 충격이었다. IMF관리 첫 해[1998], 고정투자와 소비위축에 따라 실질 GDP가 –6.9%로 떨어져 수많은 기업과 금융기관이 도산하고 실직자가 쏟아져 나왔다. 이후 급격한 경기회복과 수출의 급증에 따라 경제성장과 경상수지가 급격히 회복됨으로서 2001년 8월 한국은 IMF에서 빌린 구제금융 195억 달러를 상환하고 IMF 관리체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이 IMF 환란을 분수령으로 한국경제사회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IMF가 요구한 4대 개혁 중 기업 구조조정으로 30대 구릅 중 16개가 사라졌다. 이밖에 부실기업의 처리, 연 30%까지 치솟은 회사채 금리 등으로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거나 정리 되었다. 금융부문에서는 은행 및 대형금융사들이 퇴출되거나 외국자본에 팔리거나 공적자금 투입으로 구제되었다. 중소형 금융사들은 정리합병 또는 폐쇄되고, 특히 환란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하였던 종합금융사는 전체 30개사 중 1개만 생존하였다.
노동개혁에서는 IMF가 요구한 노동유연성 확보를 위해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가 도입되어 이후 산업현장에 비정규직 근로자가 늘어나게 되었다. 또한 민주노총이 합법화되어 노조의 고질적인 정치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불러온 장본인인 정부와 공기업부문은 구조조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이른바 ‘신의 직장’이라는 부끄러운 명성을 남기게 되었다.
환란 극복의 과정에 김대중 정부가 실시한 신용카드사용 확대 정책과 중소기업과 벤처산업 육성정책은 일시적으로 경기부양효과를 보였지만 우리경제에 신용불량자와 부실한 중소기업을 양산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기업 및 금융개혁으로 수많은 실직자가 발생하였고, 40-50대 실직자와 조기 퇴직자들이 자영업에 뛰어듦으로서 고질적인 자영업 과다의 문제가 태동하였다. 외환위기 이후 고용사정 악화로 근로소득자의 소득이 감소한 반면 고금리, 주식시장의 활황 등으로 중-고소득층의 자산소득은 증대해 이른바 ‘양극화’ 문제도 불거지기 시작하였다.
IMF 환란이 닥침으로서 수많은 실업자와 비정규직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에게는 사회안전망이 요구되고 저 소득자를 위한 복지제도가 필요하였으며 이때부터 국가의 복지계획 및 복지지출의 확대가 시작되었다. 당초 도입된 복지제도의 의미는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생계 보전의 수단과 교육, 의료 등 기초적 서비스를 공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필요한 자에의 선별적 복지’는 뒤에 ‘보편적 복지’로 확장되고, 오늘날 ‘경제적 민주화’로 변신하는 중이다.
그러나 IMF 관리체제는 그 동안 한국경제가 스스로 할 수 없었던 기업과 금융산업의 부실 을 털고 개방 및 경쟁적인 제도 도입을 강요함으로서 한국의 시장경제가 새로이 태어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기업부문에서는 분식회계, 부실감사 등이 처벌됨으로서 기업경영이 현저하게 투명해졌다. 정부가 아무 보증이 될 수 없음을 목격한 기업들은 스스로의 구조조정과 혁신을 통해서 생존 및 발전하는 방도를 찾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혁신에 성공한 기업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국제경쟁력으로 승부하는 우수기업이 되었다. 반면에 수많은 중소기업 및 서비스 사업체들은 계속 폐쇄적 시장보호와 중소기업지원정책에 의존해 연명함으로서 낙후성을 못 면하고 이후 ‘기업의 양극화 문제’를 초래하게 되었다.
IMF 체제는 외국인 직접투자, 외환거래, 자본시장의 자유화 등을 강요함으로서 우리 시장의 대폭 개방시키고, 21세기 한국경제의 ‘글로벌 시대’를 출발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외국인 투자에 대한 제한 철폐는 외인직접투자의 유입을 촉진하여 2004년 10월 직접투자 누계가 1,000억 달러를 돌파하였다.
한편 외환위기는 한국인과 한국기업이 개방과 경쟁에 직면할 때 그 잠재력을 100% 발휘한다는 사실을 일깨우게 하였다. 외환위기 이후 삼성, 현대, LG 등 각 분야의 대기업들은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여 세계의 1류 기업들과 치열하게 승부하였다. 이 위기에 우리 국민은 IMF 빚을 갚기 위한 금모으기 운동을 벌여 약 227톤의 금을 모음으로서 한국인이 자존심과 위기 극복의 의지가 투철한 국민임을 국제 사회에 과시하기도 하였다.
5, 한국경제의 문제와 미래
자본시장이 완전히 개방되고 대외 의존도가 심한 한국은 세계적 금융위기가 있을 때마다 커다란 혼란을 겪지만 금세 회복하고, 특히 산업경쟁력이 더욱 강해지는 면모를 보여 왔다. 외환위기 이후 2000년대 초반에는 삼성전자가 반도체, LCD, 휴대폰, 기타 가전제품 등에서 일본 기업들을 물리치고 세계최강자로 부상하였다. 조선공업은 2006년 현대 중공업 등 한국의 기업 수주량이 세계 1-6위를 싹쓸이할 정도로 세계시장을 석권하였다.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 이후 삼성전자는 유일하게 미국의 애플과 세계 스마트폰 시장을 양분하여 치열한 경쟁을 벌리는 존재가 되었다. 현대자동차는 구미(歐美)시장에서 일본 자동차 업체들과 어깨를 견주고 한판 승부를 펼치고 있다. 이밖에 철강, 기계, 석유화학, 플랜트 설비, 건설 등 많은 분야에서 우리기업들은 매년 세계로 진출하여 시장을 넓혀가고 있다. 최근에는 대기업의 뒤를 이어 자동차, IT, 전자, 기타 다양한 업종에서 부품기업들이 경쟁력을 키워 해외시장에서 진출하는 중이다.
이런 한국기업들의 성공은 원화 약세 속에 이루어진 우리 수출의 가격경쟁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우리 기업 종사자들의 치열한 도전, 시장개척, 품질 및 기술 향상, 기타의 경쟁력 증대 노력이 그 열매를 맺게 한 것이다. 이 결과들은 우리 국민과 기업들이 개방된 자유 시장에서의 경쟁과 자본주의의 인센티브 조건에서 최대로 잠재력을 발휘함을 증명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 경제에는 많은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경제의 성장 잠재력이 둔화되고 있다. 외환위기 이전 년 평균 8%[1991-95]였던 GDP 성장률은 2000-05년 4.5%하락하였다.
현재 노령인구는 초고속으로 증대하는 반면 아기 출산율은 세계 최저의 수준이다. 따라서 한국경제의 미래에 생산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부양인구는 더욱 늘어나게 된다. 이와 더불어 외환위기 이후 기업의 낮은 설비 투자율과 국민의 저축률 하락이 계속되어 향후 한국경제의 잠재 성장률은 2%~3% 수준으로 저하될 전망이다. 이는 우리가 새로운 성장 동력을 발굴하지 않는 이상 한국은 영원히 미국 일본 유럽의 소득수준을 따라잡지 못하고 고용도 더 이상 창출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 대기업과 중소 제조업 및 서비스 사업체 간 생산성과 수익에서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 한국의 대기업은 국가의 보호막에 안주하던 때에는 허약하였지만 외환위기 후 개방과 자율화 이후 세계적 기업으로 자랐다. 반면 중소기업, 서비스 산업 등은 수십 년 간 국가의 거대한 제도적 지원과 시장보호를 받아온 가운데 아직도 취약하다. 이 이중구조는 고용, 소득에서의 양극화를 초래하고 양 부문 간 갈등을 고조(高潮)시키는 등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다. 향후 이 취약부문에서 개방화, 자율화 등을 통해 경쟁력 향상이 이루어진다면 이 양극화 문제가 해소됨과 함께 우리 경제에 다시 새로운 성장 동력을 공급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재정건전성이 지속적으로 나빠지고 있다. 2011년 우리나라 국가채무는 420조 7천억 원으로 GDP 대비 34.0%이다. 국가채무는 외환위기 직전 1997년 말 60조3천억 원이었으나 외환위기 시 공적자금 지출 증대와 사회안전망 구축 등으로 급증하여 2002년 말 133조 6천억 원, 2006년 말 283조5천억 원 등으로 가파르게 올랐다. 한국의 국가채무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평균이 103.0%인데 비하면 아직 건전한 편이다. 그러나 국가사업을 대신 떠맡아온 공공기관, 특히 공기업의 재정 부실이 심각하여 미래 잠재적 국가채무가 되고 있다. 2011년 말 공공기관 부채는 463조원을 넘어 오히려 국가부채보다 많은 사정이다.
201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여당 야당 모두 양육비 지원, 반값등록금, 무상보육· 무상급식, 무상의료, 공무원 채용, 아동 수당, 노인 수당, 실업자 수당, 자영업 폐업자 수당 등 모든 복지지원을 발굴하여 공약하므로 이를 모두 수행하려 한다면 향후 천문학적 재정 부담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재원 동원은 세금의 증대나 정부채무의 증대로만 가능하므로 미래 세대의 부담이 된다. 또한 이러한 정부지출이 증대할수록 생산과 투자를 하는 민간부문 기업 활동이 제한된다. 이는 결국 성장률 하락으로 연결되어 빈곤과 실업의 증대, 조세수입의 하락이 초래하게 하는 것이다.
넷째, 우리나라에 "자유기업 시장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사회적 풍토가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지나는 동안 우리사회에는 과거청산과 기득권 청산의 이념이 크게 자라왔다. 이에 따라 부(富)와 기회를 재분배할 것을 요구하고, 시장경쟁과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비판하는 여론이 증대하였다. 그 뒤 이명박 정부가 ‘친 시장, 친 기업, 경제성장으로 1등선진국 진입’의 기대를 가지고 출발하였지만 곧 정의사회, 동반성장, 상생경제 등을 주장하는 정권으로 바뀌어 기업형 슈퍼마켓(SSM) 규제, 중소기업 고유[적합]업종제도, 기업 초과이익 공유제 등 반 시장 정책을 추진하였다.
2012년 선거에서 여야당은 재벌개혁 재벌과 대기업의 순환출자 금지, 출자총액제한, 골목상권보호, 중소기업 및 소상공인 적합업종 지정, 기업이익 공유제, 공무원과 사회공공서비스 일자리의 획기적 확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청년고용할당제 등 경제민주화 및 고용보장 공약을 총동원하고 있다. 이 공약들은 기업의 자유 시장 경제활동을 제약하고, 국민의 반 기업정서를 부축임으로서 국민 간의 이익다툼과 갈등을 부채질할 수 있다.
1990년대 말 IMF 환란이 닥침으로서 수많은 실업자와 비정규직이 쏟아져 나왔다.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경제성장을 이룬 우리사회에는 이 체제의 희생자인 이들에게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고 저 소득자를 위한 복지제도를 구축함이 시대적 과제가 된다. 동시에 한국경제에 성장의 활력을 일으켜 경제 전체의 소득, 고용, 복지 등을 최대한으로 창출시킬 시대적 과제를 가진다. 이 두 과제를 현명하게 선택 및 조합하여야 우리는 조화와 진보를 유지하는 미래를 건설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은 5000만 인구가 10만㎢에 몰려 사는 세계제일의 인적 자원의 국가임이 상기(想起)된다. 한국인에게는 날 때부터 경쟁이 필수적이어서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국민의 경쟁능력이 가장 축적된 나라가 될 것이다. 이처럼 국민 에너지가 축적된 국가에 경쟁적·진취적 시장 환경이 마련되면 무한 성장과 수많은 일터 공급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폐쇄적으로 가두어 정치적으로 부, 소득과 기회를 다투게 하면 국민 에너지가 “교각살우(矯角殺牛; 뿔을 고치려다 소를 죽이는)의 분쟁과 국민적 갈등으로 분출될 수 있다. 우리 국민이 20세기 후반에 이룬 경제의 압축 성장과 민주주의사회의 실현은 이런 좋은 에너지를 활용한 본보기다. 이렇게 이룬 풍요와 자유의 성취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는 그간 정반대의 길을 간 북한과의 비교로 확인할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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