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칼럼

<포럼>이승만 모르고 김일성은 아는 젊은층 [오피니언 | 2005-09-02]

yboy 2005. 9. 2. 10:17
대학입시 수시면접은 청소년들의 정신세계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다. 필자는 90여 응시자들에게 “이승만, 김일성을 아는가,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한 일은 무엇인가”를 물었다. 이승만은 친일파를 청산 못하고 친미 국가를 만든 지도자, 김일성은 항일투쟁의 영웅이라는 것이 90% 수험생의 대답이었다.

오늘날은 친미·친일의 전력(前歷)으로 사람을 가늠하는 시대이다. 이승만이 낮은 점수, 김일성이 높은 점수를 받으리라는 것은 예상한 바지만, 칼로 무 자르듯 고등학생들이 단호히 내리는 재단(裁斷)은 실로 놀랍다. 이들은 하나같이 “보천보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로 시작해 김일성의 업적을 설명한다. 이승만은 “김구 선생님과 같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미의 길로 빠진 지도자다.

이승만이 저지른 여러 가지 일을 학생들은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는 ‘김구와 같이 독립운동을 했지만 미국이 지원해서 대통령이 됐고, 반민특위를 해체하고 일제 청산을 못해 민족정신을 해쳤으며, 북한군이 내려오자 서울시민을 버리고 한강인도교를 폭파했고, 4번 대통령을 하려고 부정선거를 하다가 4·19혁명으로 쫓겨난 독재자’다. 극소수의 학생들이 건국 초기 어려운 대한민국을 이끈 대통령임을 인정했고, 또 다른 극소수는 이승만이 누구인지를 몰랐다.

그러나 김일성은 누구에게나 보천보전투의 영웅이었다. 필자는 보천보전투를 몰랐기에 우선 이를 조사해봤다. 1937년 6월 4일 김일성 박금철 등이 이끄는 항일병력이 혜산진 부근의 보천보 파출소를 습격해 일본 경찰 5명과 민간인 2명을 죽이고 ‘조선민중에게 알린다’는 포고문을 살포한 사건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1920년 김좌진의 2500명 독립군은 만주 청산리에서 5만의 일본 병력을 공격해 3300명을 죽였고, 봉오동에서는 홍범도가 일본군을 참패시켜 전사 157명, 중경상 300여명의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보천보전투는 과연 남한 학생들 모두가 외울 만큼 특별한 항일 업적인가?

북한에는 김일성의 독립투쟁 전력을 기릴 이유가 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일가의 영웅적 행적만 밝히며, 그 밖의 순국선열이나 항일민족사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과거 남한에서도 또 하나의 김일성이야기가 전파돼 왔다. “김일성(金日成) 주석의 본명은 김성주다. 독립군대장 김일성(金一城)은 보천보사건 뒤 그를 쫓던 일본군에 의해 1937년 11월 무송현에서 죽었다고 공식 발표됐다. 해방 후 소련 점령군사령관 치스차코프가 33세의 젊은 장교를 김일성 장군이라고 소개했으나 백발의 노장군을 기대했던 평양의 군중은 ‘가짜’라고 술렁거렸다. 그때 치스차코프는 ‘여기 있는 김일성이 항일투쟁의 김일성 장군이 맞느냐 틀리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앞으로 잘만 하면 되는 것이다’고 역설했다”는 이야기다.

김일성에게는 증명할 만한 영웅적 항일활동이 있을 수 있으며, 이승만에게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들의 항일활동 때문에 그들이 역사적 평가를 받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김일성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행적은 북한에 주체공화국을 세워 인민들에게 억압과 굶주림을 물려주고, 민족적 대참사인 6·25전쟁을 일으킨 일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에 무자비한 학생들이 김일성의 이런 일에는 관심이 없다. 간혹 일부 학생들이 김일성의 부정적 전력을 지적했지만 6·25전쟁을 언급한 학생은 한 사람도 없었다. 김일성의 항일 전설을 공들여 가르친 집단의 개가(凱歌)일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인민을 위해 모래알로 쌀을 만들고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드는 기적의 지도자’를 숭상하고, 가장 위험한 시기에 건국의 초석을 다진 ‘우리의 대통령’은 미국의 주구(走狗)로 능멸하는 나라가 돼 가고 있다. 학생들은 매일 병든 교육을 받고, 국민정신은 돌이킬 수 없게 썩어가고 있다. 우리 사회의 암소(癌巢)로 자란 이런 지식인 교육자들을 언제까지 용인할 것인지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김영봉 / 중앙대 교수·경제학]]

기사 게재 일자 2005-09-02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509020101313719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