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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09.12.20 23:18
- ▲ 김영봉·중앙대 명예교수
50여년 전 6·25전쟁이 끝날 무렵 필자는 현재 독립기념관이 있는 목천면 남화리에서 살았다. 마을 처녀들은 흑성산 자락에서 솔방울을 긁어 가마니에 담아 머리에 이고 새벽길 30리, 왕복 60리를 걸어 천안 읍내에 땔감으로 내다 팔아 생계를 돕던 때다. 날이 갈수록 처녀들이 탐내는 솔방울은 귀해졌다.
그러나 철조망 저편 미군이 주둔하던 흑성산 레이더 기지 안에는 솔방울이 그득했다. 어느 날 한 처녀가 기어이 철망을 뚫고 미군 경내에 들어갔다. 개가 짖고 총소리가 난 후 처녀는 총 맞은 다리를 이끌고 탈출했다. 그날 이후 처녀의 집은 언제 총을 든 미군이 들이닥칠까 두려움에 떨었다. 드디어 미군 지프가 나타난 날, 그들은 군화를 신은 채 방안에 들어왔다. 지휘관이 몇 마디 영어로 지껄인 뒤 처녀의 상처를 손질해주고 레이션 박스 몇 개를 남기고 떠났다. 잡혀가는 대신 레이션 박스를 얻은 처녀 집의 행운을 동네는 다 부러워했다.
반미 민족주의자들에게 이것은 진실 규명이 필요한 또 하나의 미군 양민총질사건, 레이션 박스에 영혼을 판 식민지 인민의 한심한 장면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그때 본 우리의 거친 삶과 미군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솔방울 한 가마를 팔기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수십리 산을 타고 목숨까지 걸던 우리 국민은 이제 G20 정상회의를 주재하는 나라를 만들었다. 그때 미군이 없었다면 이게 가능했겠는가. 지금 북한 인민의 삶은 솔방울 따던 반세기 전 남한 사람보다 나아졌는가.
미군 참전 60주년이 되는 내년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 민간인 재건팀 100명과 경호 병력 320명을 보내기로 하고 국회 인준을 기다리고 있다. 알다시피 미국은 지금 아프간에서 어려운 전쟁을 하는 중이다. 현재 아프간의 UN 다국적군과 재건활동에는 세계 50여 국가가 참여하며, 향후 3만명 증파로 6만5000명 규모가 될 미군 외에 영국은 9000명, 독일은 4365명을 파병하고 있다. 인구가 적은 네덜란드도 2160명, 뉴질랜드까지 300명을 파병한다. 그런데 다른 나라도 아닌 한국의 비전투부대 420명은 너무나도 초라하고 인색한 숫자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 파병조차 야당과 좌파단체들은 반대한다. 지난주 민노당은 "아프간에 단 1명도 보내선 안 된다. 미국에 대한 조공파병"이라고 논평했다. 참여연대는 "명분 없는 전쟁, 피해만 확실한 전쟁에 우리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학살과 점령을 위한 파병" "아프가니스탄은 침략자들의 무덤" 등 파병 국군의 정당성을 무참히 훼손하는 말까지 가림이 없다.
도대체 무엇이 조공파병, 점령군이고 젊은이를 죽음으로 내몬다는 말인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가 미국에 조공하러 파병하는가? 6·25 때 미군은 점령군, 학살군대였다는 것이 이들의 시각인가. 한국이 오늘날의 자유와 번영을 얻은 뿌리는 3만6000 미군과 15개 참전국 4000 용사의 주검이 받쳐주고 있을 것이다. 6·25 때 그들은 생면부지 코리아에 와서 자유세계를 무너뜨리려는 공산주의자와 사투했다. 과거 자유세계 연합군에게 '피의 빚'을 진 한국인이 지금 재건팀도 못 보내겠다면 이게 도대체 무슨 몰염치인가.
아프간 국민은 가난·지뢰·테러·억압의 수렁 속에 살고 있다. 이 나라를 반(反)이성, 반민주, 반인권 원리주의에 가두고 그 율법에 동의하지 않는 동족을 살해하는 자들이 바로 탈레반 소수 극단주의 테러집단이다. 국제사회가 연합하는 이유는 바로 이 집단을 제압하고 농촌·학교·도로를 재건하여 탈레반이 기생할 물리적, 이념적 근거를 없애자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