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Affairs [특집 ㆍ 위기에 처한 국체]
좌경화 경제사회모델의 위험성
김영봉*
서론; 한나라당 정권의 좌경화
2007년 한나라당은 이명박 후보의 '747 공약'(7% 성장, 4만 달러 소득, 세계 7대 경제대국 달성)을 내걸고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정권을 쟁취했다. 비록 그 목표의 실현가능성은 의심스러웠지만 정권 출범 시 국민에게 약속한 국가발전모델은 '작은 정부 큰 시장, 성장 우선주의'이다. 이는 국민의 자유와 책임에 기반 한 경제활동을 통하여 경제성장의 극대화, 이를 통한 고용과 복지의 창출을 의도하는 자유기업 시장자본주의 모델이다.
그러나 2010년 6ㆍ2지방 선거의 패배를 계기로 이 정권은 ‘친 서민, 상생과 정의’라는 기치를 내걸고 거대정부 복지주의 모델로 급선회하고 있다. 이는 정부가 국가권력과 재정을 동원하여 자유시장 기업활동을 통제 및 교정하고, 직접 복지, 고용, 및 균형 등을 창출하려는 모델이다. 이 정부는 그간 햇살 금융, 보급자리 주택 등 새로운 복지계획을 도입하였고, 기업형 슈퍼마켓(SSM) 규제, 중소기업 고유(적합) 업종제도 부활, 기업 초과이익 공유제 제기 등으로 계속 시장경제질서 교란의 논란을 일으켰다. 반면, 집권 이래 숙제이었던 영리의료법인, 서비스 개방,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등 미래 국가성장의 원동력이 달린 문제의 타개에 있어서는 아무 추진력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2012년 총선과 대선 대책을 위해 최근 구성된 한나라당 지도부는 보다 공개적으로 당이 친 서민, 반 기업의 정당으로 지향해야 함을 주장하는 중이다. 황우여 원내대표는 선출되자마자 ‘반값 등록금’을 선포한 뒤 곧 ‘영ㆍ유아 전면 무상보육’의 전도사가 되었다. 당 최고위원 일부는 민주당의 무상급식 제안과 ‘표(票)퓰리즘 정치’까지 수용할 것을 공공연히 천명하고 있다. 당 대표가 대기업에 대해 “착취요!”라고 한 발언은 향후 한나라당이 얼마나 반 기업 포퓰리스트로 발전할지 보여주는 지표(指標)다.
현재 당의 대표적 대선후보인 박근혜 의원의 간판 공약은 ‘생애 맞춤형 복지’다.
따라서 차기 선거에 한나라당이 집권하더라도 한국은 지금보다 더 좌경화 된 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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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학교 석좌교수. 연세대 경제학 학사, 미국 콜로라도 대 경제학 박사, 상공부 상역국 수출계획과장ㆍ한국개발연구원 수석연구원ㆍ중앙대 교수 역임. 저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등.
사회주의모델로 돌입할 가능성만 존재한다. 다름 아닌 대한민국의 대표적 우파정당에 의해 선도되는 이러한 경제체제 변화는 향후 국가경제상황, 국민의 삶의 형태 및 가치관, 그리고 국가 정체성에까지 장기적이고 깊은 변화를 가져오게 할 것이 예상된다.
본고는 이에 ①최근 좌경화 일로로 치닫는 정권의 경제이념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정체성 수호와 공정한 사회 실현의 견지에서 적합한 논리인가, 그리고 ②우리사회가 이행하려는 큰 정부 복지사회 모델은 지속가능하며, 미래 국민의 복지와 후생 증진에 유효한 수단인가에 대해 논의해보기로 한다.
1. 도전 받는 시장경제 이념; ‘공생발전 자본주의’와 ‘따뜻한 자본주의’
작년 우리나라에서는 세계에 유례없는 ‘공정한 사회’ 선풍이 일어나 미국, 유럽에서 10만 부도 팔리지 않은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100만부 이상 팔렸다. 센델 교수의 책은 이 세상에 정의의 개념과 목적이 다양함을 강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우리 대통령은 “친 서민 정책이 공정사회”임을 선포하였다.
최근에는 영국의 한 재정금융문제 전문 칼럼니스트(Anatole Kaletsky)의 책 이름 《자본주의 4.0》(Capitalism 4.0: The Birth of a New Economy, 2010 7)'이 한국에 ‘따뜻한 자본주의’로 등장해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책은 출간 당시 영국에서 잠간 주목을 끌었을 뿐이고, 오늘날 ‘자본주의 4.0’은 세계 어디에서도 거론되지 않는다. 내용은 4.0시대 자본주의는 “실용적으로” 변해 선진국 정부들은 복지 서비스 공급기능을 후퇴시키고 기업들은 정부정책에 협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기업독식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를 갈아치울 상생의 자본주의로 선전되고, 8ㆍ15 대통령 경축사에도 출연해 ‘공생발전 자본주의’라는 새 개념을 창조하기까지 했다.
위의 사례들은 오늘날 모든 담론이 다 ‘자본, 시장,기업 때리기’로 귀결되는 한국사회의 이념적 풍토를 보여주는 것이다. 케인즈의 큰 정부 자본주의가 실업과 인플레를 잡는데 모두 실패한 뒤 등장한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세계에 두 차례의 핵폭탄 급 금융위기를 일으키고 양극화와 실업의 파장이 일어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선진자본주의 국가 중 오늘 우리나라처럼 시장의 패악, 기업의 탐욕, 정의, 동반, 상생을 외치는 나라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지난 수십 년 간의 자유시장자본주의 시대에 한국이 이룬 빼어난 성공을 감안하면 도저히 이해 못 할 현상이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보여주는 좌 편향적 이념 지형은 1980년대 이래 학교, 학원, 문화, 연예, 언론, 기타 전문분야 현장에서 좌파세력이 집중해온 교육, 설득, 선전 노력이 결실을 맺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간 보수주의 이념에 대한 철학과 이해력을 기르지 못한 현 정권이 자초한 결과이기도 하다.
지난 6ㆍ2 지방선거에서의 패배 충격 이후 한나라당은 서민·중산층의 표심을 잡기위해 정의,나눔, 동반상생 등의 의제(議題)를 끊임없이 창출했다. 그러나 이런 화두들은 양극화 선동과 계층갈등 조장(助長)에 더없이 좋은 도구가 되기 때문이 과거 좌파정권이 각종 선전수단을 동원해 국민의 귀에 주입시켜온 것이다. ‘상생’과 ‘나눔’의 주문(呪文)이 매일 되풀이되는 가운데 사람들의 뇌리에는 자신의 처지가 ‘남의 탓’이라는 의식이 박히게 된다. 결국 중산층들도 피해자 의식을 키우게 되어 기존 보수지지층의 파괴가 일어난다. 보수정권이 이런 화두를 만들어 스스로 궁지에 빠진 것은 자유시장체제의 가치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를 지킬 신념이 없기 때문이다.
동반성장, 상생, 나눔 등은 훌륭한 사회적 가치이므로 마땅히 모든 국가사회가 관심을 기우려야할 사항이다. 그러나 이들은 관용과 배려에 기초한 가치이기 때문에 이를 증진시키려면 민주주의의 책임,시장경제의 원칙,법치주의 등 보수의 근본적 가치에 상처를 입혀야한다. 따라서 정부가 이에 과도히 몰입하면 더 많은 국민이 경쟁의 규칙을 피하고 국가에 기대는 삶에 익숙해진다. 즉, 가부장(家父長)적 사회주의이념과 포퓰리즘 정치가 기생할 토양이 조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보수정권이 본말(本末)을 잊고 자유기업과 시장을 핍박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일인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 일어나는 양극화, 고용 없는 성장 등의 책임을 오로지 기업과 시장에게 지우고 매도하는 일은 보수정권의 무지와 무책임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한국은 지난 30년간의 이른바 ‘3.0 신자유주의 자본’ 시대에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가 됐다. 그러한 나라에서 시장과 기업이 가져오는 이익은 분명히 그 폐해보다 더 크고, 국민이 이에 더 잘 적응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균형 있고 신중하게 경쟁시장 자유기업 체제의 공(功)과 과(過)를 살펴야한다. 정치가들은 이 체제를 걷어차기 전에 다음 질문들에 대답해 보아야할 것이다.
“우리 대졸청년들은 대량으로 실업자가 되는데 중소기업들은 심각한 구인난에 빠지는 이유가 대기업의 탐욕 때문인가. 왜 한국의 대기업은 수십 년 전 국가의 보호막에 안주하던 때에 허약하다가 자유시장자본주의 하에서 세계적 기업으로 자랐고, 왜 수십년간 제도적으로 거대한 국가지원을 받아온 중소기업이나 농업은 아직도 이렇게 취약한가. 한국의 제조업 매출에서 10대 그룹의 비율이 40%를 넘도록 양극화가 극심해졌다고 정치와 언론은 걱정한다. 우리나라에 삼성, 현대, 포철 등 세계적 기업이 나오지 않아 이 비율이 낮아졌었다면 지금 우리 중소기업경제가 더 잘 되고 고용이 더 많이 창출되었을 것인가.
시장과 기업이 이렇게 혐오되는 땅에서 결국 시장과 기업은 시들고 죽어버리지 않겠는가. 시장이 쇠퇴하면 시장이 편애하던 정직,성실,능력,책임 등의 덕목도 이 사회에서 쇠퇴할 것이다. 성취 의식이나 책임 없이 국가와 이웃의 덕으로 생존하면서 염치까지 잃는 인생은 과연 행복한 삶인가. 기업의 도태는 기업이 만들던 양질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정치가들이 나누어주던 거대한 국가재정도 사라짐을 의미한다. 그리된다면 따뜻한 공생자본주의,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줄 돈은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
2. 공정한 사회와 시장경제
‘공정한 사회’는 작년 지방선거 패배이후 8ㆍ15 경축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발굴해 바람을 일으킨 개념이다. 작금년 거론된 복지확대와 상생-동반 정책들은 대체로 공정사회의 실현 이념을 충족시킨다는 명분으로 제기되었다.
이 정부에게는 그간 ‘강부자’ ‘고소영’ 인사, 집권층의 병역미필 등 비판이 잦아 도덕성이 훼손 받아왔으며, 오늘날 우리사회에 특혜와 불공정 관행이 만연함도 사실이다. 불법, 부정, 비리, 부패 등의 척결은 선진문명 사회로 가는 정도(正道)이므로 현 정부가 정치, 사회 등의 분야에서 이를 국정의 우선 목표로 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문제는 정부와 한나라당이 규정하는 ‘공정한 경제사회’의 개념과 그 실현방법이다. 이 ‘경제적 공정’ 논의의 핵심은 자원과 기회를 누구에게 배분하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은 “친 서민 정책이 공정사회의 실천”이며 “공정한 사회에서는 패자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고 승자가 독식하지 않는다”고 판정을 내렸다.
이런 정권의 경제적 공정사회 개념에는, 첫째, “보수는 불공정, 진보는 공정”이란 시각이 존재한다. 이는 지난 정권기간 각인된 보수와 진보(좌파)를 나누는 개념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진보주의자는 차가 아무리 비좁더라도 ‘같이 타고 가자’라고 말하는 사람이고, 보수주의자는 ‘비좁다, 늦는다, 태우지 마라’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곧 진보의 가치는 자유, 평등, 평화, 박애, 행복을 강조하고, 보수의 가치는 시장과 경쟁을 강조한다”(《노무현 유고집, 진보의 미래》, 2009).
둘째, 우리 시장경제의 결과에 대한 부정적 시각, 즉, 정치가가 시장보다 더 공정하게 자원과 기회를 배분할 수 있다는 국가만능주의 사상이 깔려있다. 이들이 내린 한국사회의 공정은 “시장은 악(惡), 이를 수정하는 나눔, 동반, 상생은 선(善)”이라고 심판내리고 있다.
사회의 승자가 서민, 약자와 무능력자를 끌어안고 가야한다는 명제는 어느 사회에서나 옳다. 그러나 하나의 이념(좌파적 가치)을 실현시키자면 그 기회비용(우파적 가치)을 지불해야한다. 따라서 한 사회에 공정의 잣대가 균형을 유지하려면 특히 국가정치를 책임지는 인사들이 공정사회와 시장경제의 본의(本義) 및 결과에 대해 객관적이고 균형적인 인식 능력을 가져야한다. 우리 정치가들의 공정사회 제안은 자신들이 시장이 배분한 결과를 앞지를 수 있다는 전제(前提)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이들은 시장과 정부(정치가)의 작용원리를 그만큼 이해하는가?
작년 공정사회 열풍이 몰아치며 한국사회가 이의 바이블처럼 읽은 책이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이 책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논의한 정의로운 행동의 목적(telos)이 가장 많이 언급되는데, 그는 정의(justice)를 ‘각자의 신분만큼 분배하는 인간의 미덕’으로 규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회는 노예사회였으며, 따라서 인간의 가치가 없는 노예가 만든 물건에는 값을 쳐줄 수 없다는 논리다. 인간이 만드는 정의사회 관념에는 이같이 주관적 가치관이 배제될 수 없으며 사람들의 공정 잣대는 그의 신념과 이해관계에 따라 흔들리는 속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정치가들이 규정하는 공정사회의 잣대는 과연 시장보다 우월할 수 있을 것인가? 이들이 사회의 자원과 기회를 시장보다 더 정의롭게 배분하려 한다면 최소한 시장의 보통사람보다 사심(私心) 없고 사려 깊은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국회의원들은 국가-국민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정치적 생명이나 파당적 이익을 포기하는 사람들로 비춰지는가? 이들이 보여준 직업정신, 준법의식, 특권의식 등은 보통국민보다 오히려 못해 보인다. 이들은 공천과 당선을 위해서는 영혼도 팔 수 있는 파당주의자, 포퓰리스트(populist)라는 평가를 흔히 받고 있다. 이들의 정의는 오늘 서민편이지만 내일 누구 편이 될지 알 수 없다.
반면 자유시장의 투사였던 하이에크(Friedrich A. Hayek)는 시장의 위대한 점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시장 제도는, 만약 저절로 생기지 않았다면, 인간 역사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으로 선언될 만하다. 왜냐하면 시장경쟁은 이기적 인간으로 하여금 아침에 일어나 밖을 내다보고 지구로부터 원자재를 거두어-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그가 원하는 량(量)이 아니라 그의 이웃이 선택하는 량만큼, 그가 매기려는 가격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평가하는 가격에 공급하게 한다”(F. A. Hayek, "The Use of Knowledge in Society," American Economic Review, vol 35, 1945, 9). 시장이 이기적 정치가보다 훨씬 공동체를 존중하는 기구(mechanism)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는 독재자 대신 시민이 이끄는 사회다. 따라서 시민의 자율적 의지와 품성이 국가사회의 질을 결정한다. 이 사회의 ‘조화와 성장(harmony and growth)’의 열쇄는 ‘책임 추적성'(accountability)이 얼마나 존재하고 작동하는가에 달려있다. 귀책성(歸責性)이 있는 사회란 '각자에게 자신의 행위의 결과를 책임 지우는' 사회를 말한다. 성실히 일한 자, 정직하게 빚을 갚은 자, 현명하게 투자한 자는 그만큼 보상 받고, 반칙, 태만, 신용불량, 기타 나쁜 행동은 예외 없이 처벌의 고통을 받는다.
이런 귀책성 사회는 신뢰할만한 법치와 시장질서가 존재할 때 보장받는다. 우선 시장은 가장 "정확한'(exact) 보상 및 처벌 기구를 가지는 것으로 평가된다. 시장기구가 정상적으로 가동할 경우 100원의 생산성을 제공하는 생산요소에게는 100원을, 110원의 생산을 기여한 자에게는 110원을 보상한다. 100원(110원)을 잘못 투자한 자에게는 100원(110원) 만큼 처벌한다. 국가 강제력에 의한 통제(형벌 시스템)는 1명을 살해하거나 100명을 살해하거나, 1억 원을 사기한 자이거나 100억 원을 사기한 자이거나 100배는 고사하고 10배 징벌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국가복지배급체제는 무상급식 같은 보편적 복지수혜를 필요 없다는 사람들에게도 안긴다. 따라서 귀책성의 기준에서 볼 때 시장은 가장 정의로운 체제임이 판별된다.
이런 시장경제의 효과는 법치(rule of law)가 존재할 때 보장된다. 시장은 법이 보장하는 시장의 규칙에 따라 가동하여 생산, 교환, 분배를 이루며, 그 반칙자를 철저히 가려 처벌해야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반면, 큰 정부 배급체제는 관용과 배려에 기초한 체제이므로 법치를 약화시키는 속성을 가진다. 관용과 배려를 위해 법 절차를 무시하는 것은 좌파집단의 오랜 전통이기도하다.
그간 한국에서는 서민 및 생계형의 범죄에 사정을 봐주는 것이 법 집행의 통념으로 형성되어왔다. 국경일마다 수백만의 범법자 범칙자를 사면 감형함이 관례화 되어 시민의 준법의식이 이완되고,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부터 법 안 지키는 '법 경시 사회'가 됐다. 이런 온정주의 무원칙의 법치 풍토가 오늘날 기득권층의 범칙, 비리가 규탄되는 '공정 없는 사회'를 도래시킨 가장 큰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정치계가 공정한 경제사회를 이끌려는 시발점은 강력한 법치 회복에서부터 찾는 것이 가장 마땅하고 효과적일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시장경제와 법질서에 의해 지탱된다. 시장의 경기규칙이 정당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시장의 경기자, 곧 국민이 법제도를 만들고 위정자를 뽑아야 하니,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상호 병립(竝立)하는 관계에 있다. 한편, 시장과 법치는 시민에게 귀책성을 학습시키고, 이를 통해 자율, 책임, 준법 등 민주적 시민의 자질 이 형성된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보수주의의 철학은 개인의 행동이 전 공동체의 삶을 결정한다는 데서 출발한다. 따라서 귀책성의 기본 요소인 시장과 법치가 정의의 주석(主席)을 차지함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편 시장은 기계적이고 비개인적인 기구라 관용을 베풀 수 없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와 실패자를 방치하므로 국가당국은 관용과 배려로 이들을 포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 역할에 본말을 뒤바꿔 시장과 법치 이상의 정의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3. 포퓰리즘 정치와 복지사회 모델
오늘날 한국은 아마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복지사회로 이행하는 나라일 것이다. 좌파, 우파, 국회의원, 대통령선거 후보들 모두 경쟁적으로 국민에게 더 새롭고 확대된 복지공급을 약속하므로 이대로 간다면 우리는 곧 미국과 유럽의 현재 복지공급체제를 모두 갖추게 될 것이 확실하다.
한국의 좌파들은 국가에 의한 복지공급 확대가 오늘날의 ‘시대정신’이므로 유럽형 사회적 모델(European Social Model)을 본받을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의 시대적 화두는 국가채무, 초(超)긴축, 과잉복지의 탈출이다. 현재 복지 선진국들의 재정은 파탄 나고, 큰 정부 복지사회모델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음이 판정 나고 있다. 복지 과잉에 불구하고 오히려 실업은 거대하게 늘어나고, 복지 권리 축소에 대한 국민의 저항으로 사회불안이 커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 정치가들은 미래 국민과 국가의 '실존적 삶'이 달린 이 중요한 문제를 이른바 ‘표(票)퓰리즘’의 수단으로 다루고 있다. 이들이 그런 오해(?)를 일축하려면 유럽형 모형의 본질과 한국 복지시스템의 지속가능성, 우리 경제와 재정의 진실한 상태 같은 문제부터 착실히 이해야한다.
-유럽 사회적 모델의 문제
한국의 좌파가 그간 복지사회의 이상형으로 찬양하고 모방하자고 주장하는 모델은 유럽 사회적 모델이다. 이 모델의 탄생 배경과 차후 운명에 대하여는 영국의 역사학자 토니 저트(Tony Judt)의 저명한 저서 《전후》(Postwar: A History of Europe Since 1945, 2005)가 잘 설명한다.
2차 대전 후 유럽 경제가 번영할 때 유럽 정치가들이 경쟁적 개인적인 ‘미국식 삶’ 대신 모든 시민에게 고용안정과 생활보호를 보장하는 ‘통합된 사회’를 미래 비전으로 제시함으로서 이 모델은 탄생했다. 당시 유럽 국가들의 산업 경쟁력은 상승일로에 있었고, 베이비 붐 세대의 등장으로 재정 및 기금 고갈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유럽각국은 경쟁적으로 복지와 재정을 늘렸다. 1960〜69년 평균 32%던 독일의 GDP 대비 정부지출의 비율은 1996년 56%로, 스웨덴은 31%에서 66%로 치솟았다. 그리스는 17%에서 49%, 스페인은 14%에서 45%로 증대됐다.
그러나 오늘날의 유럽인들은 이들이 약속한 안전한 직장과 안락한 삶을 더 이상 보장받지 못한다. 적자예산과 국가채무 누적, 국가 신용등급 추락, 국가부도위기가 오늘날 유럽을 상징하는 그림이 되고 있다. 오늘날 유럽에 남은 생산력은 거대한 국가재정으로 왜축된 민간 생산영역과 그간의 정부의존에 중독된 노동자들뿐이다. 유럽은 이들의 쇠락하는 경쟁력으로 글로벌 경쟁체제에 새로이 부상하는 경쟁국과 싸워서 경제와 고용을 유지해야한다.
따라서 유럽의 성장능력은 한계에 부딪치고 고용상황은 날로 악화될 수밖에 없다. EU의 경제성장률은 세계경제가 4%로 성장하던 2004~5년의 초(超)호황기에도 1.5%수준에 머물렀다. 2009년 말 EU 27개국의 평균 실업률은 9.8%, 25세 이하 청년실업률은 21.8%이었고, 스페인의 실업률은 19.5%, 청년실업률은 44.5%였다. 이 유럽 복지사회의 후손들이 더 줄어든 노동력으로 더 빨리 늘어나는 은퇴인구를 부양하고 더 나쁜 환경에서 그 선대(先代)가 만든 복지통합사회의 비용을 치러야하게 된 것이다.
유럽 모델의 교훈은 이것이 지속 불가능함을 입증했다는 것이다. 유럽과 미국 및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은 현재 그들이 빠진 적자재정과 과잉복지체제의 늪에서 탈출하려 안간힘 쓰고 있다. 미국의 재정적자는 3조7000억 달러, 정부지출의 40%를 부채에 의존하고 있으며, 누적국가채무는 14조3000억 달러에 달한다. 최근 이 부채한도의 2조4천억 달러 증액 의회승인을 법정 시한 하루 전에 겨우 얻어내 미국의 국가부도와 세계경제 패닉의 위기를 넘겼다. 일본의 누적국가채무는 금년 말 국내총생산(GDP) 대비 204%로, 내년에는 210%로 높아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2011년도 일본의 예산은 세수 40.9조 엔, 국채 발행 44.3조 엔으로 세금보다 빚으로 더 많이 충당할 형편이다. 영국은 극렬한 폭동사태에도 불구하고 대학등록금을 3배로 올리고 프랑스는 연금개혁을 단행했다. 복지국가의 대명사인 스웨덴은 부의 국외 탈출과 경제 침체를 견디지 못하고 복지 삭감에 병행해 평균 60%의 소득세율을 30%로 끌어내리고 상속세,부유세를 없애는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따라서 유럽에서는 이제 복지사회 신앙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유럽 정치가들은 모두 이를 알고 좌파 및 노동조합도 알고 있으며, 단지 국민이 이에 적응하지 못해 경제 및 사회불안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가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이것이 시대정신이라며 그 수렁에 국민을 끌어넣으려 하는 것이다.
-한국 복지사회 모델의 문제
오늘날 한국의 모습은 그간 유럽이 이행한 과정과 놀랍게 일치한다. 한국경제는 현재 잘 나가는 편이고 국가재정은 비교적 안정된 상태며 정치가들은 통 크게 복지배급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급속한 노령화와 노동력 감소, 투지감소로 성장잠재력은 이미 3%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국가재정기반은 이미 심각하게 악화되는 중이다. 신흥경제국들의 도전을 받을 우리 산업경쟁력은 반 기업 반 시장정책으로 더욱 크게 상실 될 위험에 처해있다.
1970년대 말 국민연금, 국가의료보험 등 사회보장 시스템을 설계할 당시 한국인은 65세까지 납입만 하고 모두 사망할 것이 예상되었다. 국민은 30여년 일하여 국가복지기금을 채우고 은퇴자의 수년 남은여생 간 이를 빼어내 갈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1970년 61.9세,1980년 65.7에서 2009년 80.5세로 연장되었다. 반면 부부합계 출산율은 1975년 3.43명, 1980년 2.82에서 2010년 1.22로 추락했다.
따라서 유럽에서나 한국에서나 복지-재정 공급체계는 태어날 때부터 거덜 날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일례로, 보건사회연구원은 2010년 말 34조8990억 원이던 건강보험 지출액이 2050년에 623조4180억 원으로 거의 18배 증가할 것으로 전망한다. 건보지출은 40년 뒤 GDP 대비 21.7%까지 치솟고, 건강보험료는 소득의 38.2%까지 오를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그나마 현행 제도에 변화가 없음을 가정한 예상이다. 지금 같은 정치권의 무상의료 및 혜택 확대 공약이 실현되고 고령화 인구증대가 가속화될 경우 이는 더욱 악화된다.
좌파들은 한국의 GDP대비 사회복지지출은 11%(2008년)로 OECD 평균 24%에 미달하고 국가부채 36%도 OECD 평균 75%의 절반에 미달하므로 국가복지체계를 유럽수준으로 확충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 국가채무는 2002년 133.8조 원(GDP의 18.5%)에서 2010년 392.2조 원(GDP의 33.4%)으로 초고속 증대를 하는 중이다. 더욱, 한국경제연구원의 《국가채무 관리 어떻게 해야 하나》(2010 8)에서는 우리 국가채무 통계가 국제기준에 비해 과소평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국제비교를 위해서는 공기업의 부채, 국회의 예산심사와 의결을 거치는 금융성 기관의 부채, 통안(通安)증권, 외환보유고 관리 등 중앙은행의 준(準)재정 활동에 의한 부채, BTL(임대형 민간투자사업), 연금 분야의 책임적립금 등이 국가채무에 포함되어야 한다-- 2007년도 정부 발표의 국가채무는 298.9조원(GDP의 33.2%)이지만 이들을 모두 포함할 경우 690.5조원으로 GDP 대비 76.7%로 증대한다. 275개 공기업의 부채를 포함하고 정부의 對민간보증을 포함할 경우 국가채무는 1,171.6조원으로 GDP 대비 130%에 달한다”는 것이다.
한편 안종범 교수가 정부에 제출한 “저출산·고령화에 대비한 장기 복지 재정계획 수립 방향”(2011 7)에서는 1990년 GDP 대비 3.0%였던 복지지출이 2005년 8.0%로 증가했으며, 2050년에는 45.6%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됐다. 복지지출 규모는 2010년 118조원에서 2050년 2천357조원으로 증가함으로서, 국민조세부담률을 20.8%로 유지할 경우,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2050년 216.4%로 올라갈 것으로 예측된다. 만약 유럽연합의 가이드라인인 국가채무비율 60%를 유지하려면 현재 20% 선인 조세부담률을 2배가량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 큰 정부와 작은 국민
모든 경제사회 이념과 모델은 본질적으로 국가사회와 개인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끝으로 국가의 복지공급 역할 증대가 그 의도하는 바의 복지와 경제적 후생을 국민 개인들에게 항구적으로 적절히 공급해 줄 수 있는가를 살펴본다.
1998년 미국 상원의 합동경제위원회(JEC)가 펴낸 《정부의 규모 및 기능과 경제성장》은 선진국에서 양자의 관계를 실증적으로 분석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3개국에서 GDP 대비 정부지출 비율은 1960년 평균 27%에서 1996년 48%로 증가했으며 이는 거의 복지비용증대 때문이다. 그런데 이 비율이 25% 미만인 나라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6.6%, 30∼40%일 경우 3.8%, 60%이상 1.6% 등 정부가 커질수록 성장률은 일관적으로 낮아졌다. 이 보고서는 미국의 GDP 정부지출 비율이 계속 1960년대 수준을 유지했더라면 1996년 실질 GDP는 20% 정도 더 늘어났을 것으로 추산한다.
JEC의 결론은 GDP 대비 정부지출 비율이 10% 포인트 증가할 대마다. 경제성장률은 1% 포인트 감소한다는 것이다. 1996년 OECD국가의 정부지출은 GDP의 48%로 높아졌다. 그러나 국민의 신체와 재산보호, 방위, 교육, 통화안정, 사회간접자본 등 정부의 핵심기능에는 단지 GDP의 15% 미만의 지출만이 유지되어, 비대해진 공공부문의 낮은 생산성이 민간부문에서의 생산성 성장 이득을 말소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는 복지와 일자리 예산으로 ‘큰 정부’가 만들어지고, 과대한 정부지출이 필연적으로 민간기업의 투자, 고용의 역량을 파괴시키며, 따라서 오히려 성장률 하락에 의한 빈곤 및 실업증대를 초래함을 경험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이런 복지정책의 최대수혜자는 말할 바도 없이 정부 관료와 정치가다, “정부가 클수록 시민은 작아진다”는 속담은 어느 경우에나 진리일 것이다. 국가의 복지 살포(撒布)는 필연적으로 정부와 정치가의 의사결정 권력을 키우고 의존적이고 불성실한 국민을 양산한다. 사회에 능력과 성실을 갖춘 자의 기회는 축소되고 남의 덕에 사는 자의 권리부여(entitlements)는 증대된다. 과연 이렇게 공동체의 건강과 발전에 기여하는 자를 징벌함이 정의인가, 선대(先代)의 불로(不勞)권리는 후대(後代)가 땀 흘려 갚을 빚이 된다. 이것도 정의를 실현하는 것인가.
오늘날 좌향적 경제사회모델로의 이행이 가져올 수 있는 경제상황, 이념, 국가정체성 등 모등 변화 중 가장 우려되는 바는 이것이 “공동체를 이에 적합지 않은 시민으로 가득 채우는 것”으로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