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신년연설을 통해 양극화를 대한민국의 의제로 만들었다. 지난주에는 국민이 반대하므로 양극화 해소를 위해 당장 세금을 올릴 생각은 없다고 했으나 이 문제를 국민이 잊도록 계속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처럼 양극화를 선전하는 대통령이 다시 나올지 의문이지만, 그는 과연 현실에서도 양극화 해소에 기여하는 대통령이 될 것인가?
양극화는 왜, 누구 때문에 초래되는가. 비록 짧은 기간이나 모든 소득분배지표가 현 정권 아래서 나빠지고 있다. 0에 가까울수록 균등한 분배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1960년대 0.34 수준에서 경제성장기를 지나며 90년대 중반 0.28까지 개선됐다. 환란을 겪자마자 0.32로 악화됐으며, 참여정부 출범 때까지 0.306으로 낮아졌으나 지난해에 또다시 0.310으로 올라갔다. 상위 20%의 가계평균소득을 하위 20%로 나눈 소득 5분위 배율도 2002년 5.18에서 2004년 5.41로 크게 확대됐다.
경제가 좋아질 때 소득분배가 좋아지는 것은 상식이다. 정권이 아무리 일자리 지원과 국가분배 체계를 확대해도 그것이 시장경제 활동 왜축(矮縮)의 원인이 되면 서민경제가 우선 타격받게 돼 있다. 현 정권 내내 세계 경제환경은 극도로 좋았으나 우리 경제는 죽을 쑤었다. 정권은 3년간 과거 정권 탓, 10년 뒤를 내다본 구조개혁 따위로 구실을 댔지만 이것은 그들 끼리나 통할 수 있는 핑계다. 이 정권 아래서 침체된 경제, 그 결과 개선은 고사하고 오히려 심화된 양극화에 대해 정권은 최소한 ‘미필적 고의’의 책임이라도 느껴야 옳다.
또 하나, 오늘날 우리의 양극화가 그렇게 심각한 수준인가. 세계은행 통계(2004)에 따르면, 한국의 지니계수는 통계가 존재하는 127개국 중 27위다. 3위 일본(0.25)보다는 못하지만 프랑스(0.33) 미국(0.41) 중국(0.45)보다 좋다. 우리의 양극화 문제는 국가 수준에 알맞게 조용히 노력할 일이지, 군대를 반으로 줄여서라도 해야 한다고 방정을 떨 일은 아닐 것이다.
또한, 정권이 기왕에 양극화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라면 “우리는 약자와 소수를 위해 성장을 희생시키더라도 사회보장을 확대할 것”이라고 정직하게 말해야 옳다. “시장은 양극화를 촉진하는 경향이 있으니 국가 주도로 분배를 촉진해야 성장이 더 잘 된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로 국민을 꾀려 들면 안된다. 아무 산업이 없는 후진국이 전통경제로부터 벗어나려면 농업부터 발전시켜 농촌구매력을 바탕으로 공업생산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는 절대빈곤국 균형발전론을 지금 우리나라에 대입하자는 것인가.
양극화는 그 원인도 해결책도 시장경제에 있다. 국민에게 소득을 안기고 일자리를 마련함에 있어서 정부나 정권은 능력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시장 기업의 상대가 안 된다. 그러나 정권은 집요하게 시장경제자원을 거둬서 국가 스스로 양극화 문제의 해결사가 되려 한다. 대통령은 기업에 대해 양극화 해소에 동참하도록 “앞으로 우는 소리도 좀 하겠다”고 했으나 기업 본연의 업무가 바로 투자와 고용을 하고, 그 결실로 소득을 창출하고 세금을 내는 것이다. 기업은 이를 노동자와 정부를 생각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경쟁시장에서의 생존 본능 때문에 한다.
반대로 정치인만큼 낭비를 생활화하고 능력보다 사(私)적 정치적 연고를 따져 공직을 나눠 갖는 집단도 없을 것이다. 정말 존경받을 소수를 제외하고 이들이 자신보다 국리민복(國利民福)을 먼저 생각한다고 믿지 말라. 정치인들은 평생 제 돈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라 정부 기구를 늘리고 정권 목적을 위해 국가 자원을 낭비하는 것이 본능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애덤 스미스는 큰정부를 부정한 것이다.
그런데 정치적 현실은, 양극화를 만드는 자들이 양극화를 더 선전하고 양극화가 진행될수록 그들에게 쏠리는 표가 늘어난다. 국민을 볼모로 잡은 스톡홀름 신드롬이랄까. 현 정권은 누구보다 이 정치 기술을 터득한 집단인 것 같다.
[[김영봉 / 중앙대 교수·경제학]]
기사 게재 일자 2006-01-31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6013101013137191004
양극화는 왜, 누구 때문에 초래되는가. 비록 짧은 기간이나 모든 소득분배지표가 현 정권 아래서 나빠지고 있다. 0에 가까울수록 균등한 분배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1960년대 0.34 수준에서 경제성장기를 지나며 90년대 중반 0.28까지 개선됐다. 환란을 겪자마자 0.32로 악화됐으며, 참여정부 출범 때까지 0.306으로 낮아졌으나 지난해에 또다시 0.310으로 올라갔다. 상위 20%의 가계평균소득을 하위 20%로 나눈 소득 5분위 배율도 2002년 5.18에서 2004년 5.41로 크게 확대됐다.
경제가 좋아질 때 소득분배가 좋아지는 것은 상식이다. 정권이 아무리 일자리 지원과 국가분배 체계를 확대해도 그것이 시장경제 활동 왜축(矮縮)의 원인이 되면 서민경제가 우선 타격받게 돼 있다. 현 정권 내내 세계 경제환경은 극도로 좋았으나 우리 경제는 죽을 쑤었다. 정권은 3년간 과거 정권 탓, 10년 뒤를 내다본 구조개혁 따위로 구실을 댔지만 이것은 그들 끼리나 통할 수 있는 핑계다. 이 정권 아래서 침체된 경제, 그 결과 개선은 고사하고 오히려 심화된 양극화에 대해 정권은 최소한 ‘미필적 고의’의 책임이라도 느껴야 옳다.
또 하나, 오늘날 우리의 양극화가 그렇게 심각한 수준인가. 세계은행 통계(2004)에 따르면, 한국의 지니계수는 통계가 존재하는 127개국 중 27위다. 3위 일본(0.25)보다는 못하지만 프랑스(0.33) 미국(0.41) 중국(0.45)보다 좋다. 우리의 양극화 문제는 국가 수준에 알맞게 조용히 노력할 일이지, 군대를 반으로 줄여서라도 해야 한다고 방정을 떨 일은 아닐 것이다.
또한, 정권이 기왕에 양극화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라면 “우리는 약자와 소수를 위해 성장을 희생시키더라도 사회보장을 확대할 것”이라고 정직하게 말해야 옳다. “시장은 양극화를 촉진하는 경향이 있으니 국가 주도로 분배를 촉진해야 성장이 더 잘 된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로 국민을 꾀려 들면 안된다. 아무 산업이 없는 후진국이 전통경제로부터 벗어나려면 농업부터 발전시켜 농촌구매력을 바탕으로 공업생산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는 절대빈곤국 균형발전론을 지금 우리나라에 대입하자는 것인가.
양극화는 그 원인도 해결책도 시장경제에 있다. 국민에게 소득을 안기고 일자리를 마련함에 있어서 정부나 정권은 능력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시장 기업의 상대가 안 된다. 그러나 정권은 집요하게 시장경제자원을 거둬서 국가 스스로 양극화 문제의 해결사가 되려 한다. 대통령은 기업에 대해 양극화 해소에 동참하도록 “앞으로 우는 소리도 좀 하겠다”고 했으나 기업 본연의 업무가 바로 투자와 고용을 하고, 그 결실로 소득을 창출하고 세금을 내는 것이다. 기업은 이를 노동자와 정부를 생각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경쟁시장에서의 생존 본능 때문에 한다.
반대로 정치인만큼 낭비를 생활화하고 능력보다 사(私)적 정치적 연고를 따져 공직을 나눠 갖는 집단도 없을 것이다. 정말 존경받을 소수를 제외하고 이들이 자신보다 국리민복(國利民福)을 먼저 생각한다고 믿지 말라. 정치인들은 평생 제 돈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라 정부 기구를 늘리고 정권 목적을 위해 국가 자원을 낭비하는 것이 본능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애덤 스미스는 큰정부를 부정한 것이다.
그런데 정치적 현실은, 양극화를 만드는 자들이 양극화를 더 선전하고 양극화가 진행될수록 그들에게 쏠리는 표가 늘어난다. 국민을 볼모로 잡은 스톡홀름 신드롬이랄까. 현 정권은 누구보다 이 정치 기술을 터득한 집단인 것 같다.
[[김영봉 / 중앙대 교수·경제학]]
기사 게재 일자 2006-01-31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6013101013137191004